팬오션이 사외이사 반대를 무릅쓰고 잉여현금 운용 전략을 바꿨다. 올해 상장 지주사인 한진칼 지분 인수부터 사모펀드 출자까지 투자 폭을 넓혔다. 금리 인상 시기에 단기 예금 위주였던 자금 운용 틀을 깼다. 일부 사외이사가 갑작스러운 투자 기조 변화를 경계하는 목소리를 냈지만, 지분 투자 규모를 늘리며 본업 외 투자 영역에서 가외 수익을 노리고 있다.
팬오션이 경영권 분쟁이 한 차례 일단락된 한진칼 지분을 사 모으며 5% 이상 주주로 올라섰다. 지난 6일 시간 외 대량매매(블록딜)로 호반건설이 들고 있던 한진칼 지분 4.96%를 1259억원에 취득했다. 기존 0.84%였던 팬오션의 한진칼 지분은 5.8%까지 상승했다.
팬오션은 배당과 시세차익을 노린 단순투자라고 선을 그으며 확대 해석을 경계하는 모습이다. 추후 한진칼 지분 5% 보유 공시 때도 보유 목적을 주주활동 의사가 담긴 일반투자가 아니라 단순투자로 밝힐 예정이다.
한진칼은 지난 3분기 누적 기준으로 흑자전환(별도 기준 당기순이익 4243억원)을 이루며 연말 배당 재개에 청신호가 켜졌다. 지난해와 2020년에는 별도 기준 당기순손실을 기록해 배당을 지급하지 못했다. 한진칼은 별도 기준 당기순이익(일회성 비경상이익 제외) 50% 내외를 주주에게 환원하는 배당정책을 수립해두고 있다.
한진칼은 팬오션이 2015년 하림그룹 품에 안긴 뒤 처음으로 매입한 상장 주식이다. 팬오션은 지난해까지 지분 투자를 본업인 해운업에 연관된 비상장사에 국한해서 진행했다. 대부분 종속·관계기업으로 편입한 곳들이다. 잉여현금은 위험 노출이 제한된 단기 예금에 맡겨 뒀다.
올해부터는 여유 자금을 여러 투자처로 분산하기 시작했다. 지난 5월 한진칼 지분 매입이 신호탄이었다. 6월까지 총 64억원을 들여 한진칼 지분 0.15%를 확보했다. 이후 9월까지 136억원(지분 0.44%)을 써서 한진칼 지분을 0.59%로 늘렸다. 이번 한진칼 주식 블록딜 전에도 지분 0.25%를 추가로 취득했다.
사모펀드에도 자금을 태웠다. 지난 7월 '스톤브릿지 한앤브라더스 퀀텀 제2호 사모투자 합자회사'에 156억원을 출자해 지분 27.98%를 손에 넣었다. 해당 펀드는 지분법 손익을 인식하는 관계기업으로 분류하고 있다.
한진칼 지분 투자와 사모펀드 출자는 그동안 팬오션 자금 운용 기조와 결이 다른 행보다. 팬오션은 2015년 선박관리업체 포스에스엠 인수 이후 지난해까지 하림그룹 계열사와 팬오션 종속·관계기업 출자 외에는 별도 투자를 집행하지 않았다. 지난해 해상 물동량 증가로 호실적(연결 기준 당기순이익 5493억원)을 거두며 늘어난 현금을 놀리기보다 적극적으로 운용하는 방향으로 투자 기조를 선회했다. 지난 3분기 말 별도 기준 현금성 자산은 2020년 말보다 6005억원 증가한 7894억원(기타금융자산 포함)이다.
개별 투자 건에서 사외이사 반대에 부딪히기도 했다. 지난 7월 팬오션 이사회 안건으로 사모펀드 출자와 한진칼 지분 취득 승인 안건이 상정됐다. 오광수 사외이사는 둘 중 하나의 안건에는 반대 의견을 냈다. 오 사외이사가 구체적으로 어떤 투자 건에 반대했는지와 반대 사유는 공개하지 않았다.
김홍국 하림그룹 회장을 비롯한 사내이사진과 나머지 사외이사가 찬성해 타법인 지분 취득 승인 안건은 모두 가결됐다. 팬오션은 이사회 운영 규정에 따라 100억원(또는 자기자본 2.5%) 이상 타법인 지분 취득 또는 처분 시 이사회 결의를 거치도록 하고 있다.
오 사외이사는 팬오션 이사회에서 처음으로 반대 의견을 피력했다. 2019년 3월 사외이사로 선임돼 불참한 이사회를 제외하곤 줄곧 찬성 의견을 내왔다. 법무법인 대륙아주에 재직 중인 대표 변호사로 청주지방검찰청 검사장, 대구지방검찰청 검사장 등을 역임한 법무 분야 전문가다. 팬오션이 기업, 금융 및 구조조정, ESG, 중대재해 분야 등에서 조언을 구하기 위해 사외이사로 선임했다.
팬오션 관계자는 "한진칼과 사모펀드 투자는 이사회 규정에 맞춰서 필요한 절차를 다 밟은 건"이라며 "한진칼은 항공업 실적 개선 기대에 따른 배당 수익, 평가 차익이 목적인 단순 투자"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