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롯데케미칼 '보수 경영'의 종말?

IMF 이후 '빅딜'의 역사…일진머티리얼즈 딜과 차이점은

박기수 기자  2022-11-03 17:01:42
다음 달 27일이면 신동빈 회장이 롯데케미칼의 탄생을 축하하며 합병 선포식에서 환호한 지 딱 10년이 된다.

그 전까지 롯데케미칼은 호남석유화학과 롯데대산유화, KP케미칼 등 세 회사로 나뉘어져 있던 회사였다. 롯데케미칼의 전신은 호남석유화학이고 나머지 두 회사는 호남석유화학이 인수한 회사들이다. 다시 말하면 현재의 롯데케미칼은 인수·합병(M&A)으로 탄생한 회사라는 의미다.

◇롯데케미칼을 구축한 '빅딜'의 역사

호남석유화학의 두 회사 인수 과정은 가까우면서 멀게 느껴지는 1990년대 후반 IMF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호남석유화학은 규모의 경제를 갖추기 위해 공격적으로 확장 전략을 취해오다가 1997년 IMF라는 암초를 만난다.

당시 대표이사였던 고(故) 신격호 명예회장은 경영 최우선 목표로 재무구조 개선을 꼽았다. 두 자릿수 금리가 우습게 찍혔던 당시 분위기였지만 신 명예회장은 일본 금융시장을 통해 저렴한 금리로 자금을 조달하는 등 위기를 넘겼다. 당시 삼성종합화학, 현대석유화학, 대림산업 등 국내 주요 석유화학 회사들이 구조조정 대상기업에 올랐지만 호남석유화학은 굳건히 풍파를 버텨냈다.

이는 곧바로 기회가 됐다. 2000년대 초반 IMF의 한기를 이겨내지 못한 현대석유화학이 M&A 시장에 등장했고 롯데케미칼은 2003년 LG화학과 함께 공동으로 지분을 인수했다.이후 2005년 LG화학과 지분 정리 작업을 거치고 100% 자회사로 만든 뒤 사명을 '롯데대산유화'로 바꿨다.

현대석유화학을 인수하는 과정에서 호남석유화학은 동시에 방향족 사업을 영위하고 있던 KP케미칼의 지분 53%도 인수하며 외형을 확장했다. 2004년의 일이다. KP케미칼과 롯데대산유화까지 모두 인수한 호남석유화학은 2012년 세 회사가 하나로 합병하면서 현재의 롯데케미칼이 됐다.

출처: 롯데케미칼

또 한 번의 '빅딜'은 2015년 10월이다. 당시 화학 사업을 비핵심자산으로 분류하고 매각에 나섰던 삼성그룹의 화학사들 일부를 롯데가 가져갔다. 삼성SDI 케미칼부문과 삼성정밀화학, 삼성BP화학이다. 각각 현재는 롯데케미칼 첨단소재부문, 롯데정밀화학, 롯데BP화학으로 간판을 바꿨다. 당시 인수금액은 3조원으로 국내 화학업계 최대 규모의 M&A였다.

롯데케미칼의 역사를 만든 두 건의 M&A의 공통점은 기준금리 인하 시기에 시장 내 유동성이 돌고 있던 시기였다는 점이다. 현대석유화학을 인수하던 2003년 당시 미국 기준금리는 1%대로 하락하고 있었고 한국 기준금리 역시 5%대에서 3~4%대로 하락 중이었다. 이후 2015년 삼성 빅딜 당시에는 서브프라임 사태 이후 미국 기준금리는 제로금리에 가까웠다. 한국 기준금리 역시 2%대 중반에서 1%대로 하락하고 있는 추세였다.

크게 3번의 빅딜(△현대석유 △KP △삼성)이 있었음에도 롯데케미칼의 재무구조는 매우 건전한 편이었다. 시장에서는 대표적인 '가치주'로 꼽혔다. 3조원을 들여 인수했던 삼성 빅딜 이후에도 롯데케미칼의 연결 부채비율은 100%를 넘지 않았다. 섣부른 사업 확장보다 안정을 중시한 보수적인 재무 정책을 펼친 결과다.

빅딜로 사왔던 회사들 역시 제 몫을 해주고 있다. IMF 이후 인수한 회사들은 현재 롯데케미칼의 올레핀·방향족 사업의 척추 역할을 하고 있다. 첨단소재 부문과 롯데정밀화학 역시 연결 수익성의 일관성을 더해주고 있다.

◇일진 딜은 무엇이 다른가

이번 일진머티리얼즈 인수는 2015년 이후 롯데케미칼의 역사에 한 획을 그을 수 있는 또 하나의 빅딜이다. 다만 앞선 딜과는 처한 상황이 분명 다르다.

우선 자금시장의 상황이다. 미국 기준금리가 자이언트 스텝을 반복하면서 어느덧 4%까지 치솟았다. 급격한 금리 인상에 시장 분위기가 얼어붙으면서 롯데케미칼이 지금껏 누려왔던 '저비용 조달'이 앞으로는 힘들어질 가능성이 크다. 총 2조7000억원이라는 큰 돈이 들어가는 M&A이기 때문에 인수 이후 신용등급(현재 AA+) 하락 가능성도 있다. 신용등급이 하락하면 조달 비용이 또 늘어난다.

일진머티리얼즈가 영위하는 사업이 그간 롯데가 하지 않았던 아예 새로운 영역이라는 차이점도 있다. 현대석유·KP케미칼 사례는 롯데케미칼이 해왔던 사업을 강화한 차원이었고, 삼성 빅딜로 사왔던 회사들 역시 역시 같은 화학군 사업을 해왔던 곳이라는 공통점이 있었다. 그러나 일진머티리얼즈의 '동박·전지박'은 그간 영위해왔던 사업과는 결이 다르다.

롯데케미칼의 현 재무 상황도 이전과는 조금 달라졌다. 아직 연결 부채비율이 52.1%(6월 말 연결 기준)에 그칠 정도지만 순차입금이 9343억원으로 1조원에 다다른다. 현금성자산이 3조3390억원이나 있음에도 차입금이 4조2733억원까지 늘어났기 때문이다. 일진머티리얼즈 인수 이후에 현금성자산은 적어지고 차입금은 늘어날 에정이라 순차입금 규모는 크게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


2015년 삼성 빅딜 이후에도 순차입금이 1조원 이상으로 늘어났던 시기가 있었지만 이후 석유화학시장의 초호황기가 찾아오면서 재무 안정을 찾을 수 있었다. 2015년 연결 영업이익으로 1조6111억원을 기록한 롯데케미칼은 호황기에 마지막이었던 2019년까지 누적 영업이익으로만 10조1598억원을 기록했다.

일진머티리얼즈 이후에 이런 호황기가 다시 찾아올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금리 인상 시기에 석유화학 제품에 대한 수요는 줄어드는 추세다. 올해 실적도 처참하다. 올해 롯데케미칼은 상반기 영업이익으로 612억원만을 기록했다.

단기자금시장 경색으로 자회사 자금 수혈 역할을 해내고 있다는 점도 이전과의 차이점이다. 최근 롯데케미칼은 롯데건설에 5000억원의 대여금을 건넸고 유상증자로 자금 수혈까지 해줬다. 두 건의 자금지원을 합산하면 약 6000억원에 이른다. 롯데건설의 PF 만기 구조 상 내년 상반기에도 유동성 지원에 나설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어 롯데케미칼 입장에서는 부담이 크다.

이번 일진머티리얼즈 딜 이후 롯데케미칼이 IMF 이후 지켜왔던 보수적 재무 기조는 큰 변화를 맞이할 전망이다. 재계 관계자는 "M&A로 성장한 기업인만큼 일진머티리얼즈 인수에 대한 자신감이 상당했을 것"이라면서 "시장 상황 악화 속에 적지 않은 자금을 소요하는 딜이기 때문에 인수 이후에도 시장에서 전통적인 가치주로 분류될 지는 미지수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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