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에서 가장 몸값이 비싼 CFO는 누굴까. 알파벳의 루스 포랏이다. 포랏을 영입한 2015년 구글은 지주사 알파벳을 세우고 수백개의 사업부를 독립 자회사로 쪼갰다. 실리콘밸리를 시끄럽게 한 대규모 조직혁신이었다. 변신이 성공으로 끝난 데는 포랏의 공이 컸다.
부진한 프로젝트를 미련없이 중단했으며 전망이 밝은 사업에는 돈을 쏟아부었다. 주가 부양의 지름길인 주식분할이나 주식배당은 마다했다. 선택이 과감했던 만큼 마찰도 불가피했다. 내부에서 ‘Ruth-less(무자비한)’라는 별명이 붙었다. 하지만 4년도 채 지나지않아 알파벳 주가는 100% 넘게 치솟았다.
포랏은 여전히 CEO와 존재감이 비견될 정도로 경영전면에 나서고 있다. 재무에 더해 사업운영과 HR, 부동산, 업무환경 솔루션까지 관여한다. 백오피스에 갇혀 있지 않은 대표적 CFO인 셈이다.
그런데 국내 사정은 다소 김이 빠진다. “글쎄요. 재무적 성패를 바꿀 수 있는 CFO가 국내에 얼마나 있을까요? 권한도 의지도 부족한 CFO가 대부분일겁니다.” 몇 달 전 만난 어떤 기업의 CFO가 털어놓은 속내다. 사업적 영역은 커녕 핵심업무인 조달마저 CFO에게 결정권이 없는 경우가 많다고 했다.
최근 상장을 물린 현대오일뱅크를 보면서 그의 이야기가 떠올랐다. 세 번째 반복된 철회를 그저 ‘운이 없다’고 이해하기엔 무리가 있다. 시장이 나빠졌어도 변수에 대처하는 것이 경영진의 책임이다. 전략 수립에 CFO의 전문성과 역할이 충분히 강조됐을까. 현대오일뱅크는 연결 자산이 20조원에 이르지만 지주사인 HD현대 CFO가 재무에 관여하고 있다.
현대중공업그룹뿐 아니라 대부분의 CFO들은 숨어있길 좋아한다. 오너, CEO를 두고 앞으로 나서는 것이 부담스럽기 때문이다. 얼마 전 만난 IB 관계자는 그중에서 기조가 다른 곳으로 한화를 꼽았다. 그는 "보수적인 그룹들과 달리 한화는 CFO들이 대체로 적극적이고 새로운 조달 전략에도 관심이 많다"고 평했다. 인수합병으로 성장한 그룹이다 보니 전통적으로 CFO의 중요성도 남달랐던 모양이다.
최근 사례를 보면 한화솔루션이 국내 최초로 ESG 기업어음(CP)을 발행했다. 지난해에는 신용인 CFO가 블룸버그와 인터뷰에서 조달 전략을 밝히기도 했다. 국내에선 드문 일이다. 또 ㈜한화의 김민수 부사장은 올해 4월 나이스신용평가에 ESG 등급 평정을 먼저 제안했다. 그가 직접 나서 ESG 경영 방침과 투자계획을 설명하고 A등급을 따냈다.
앞으로도 CFO의 역할 확대는 필연적이다. 재무와 ESG, 기술이 뗄 수 없는 관계가 되고 있는데 '최고재무책임자'가 뒤에서 금고만 지키는 것은 고루하다. 혁신에 집중하지 않으면 도태된다는 것이 루스 포랏의 조언. 이제 백오피스를 탈출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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