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 취재를 하다 보면 가끔 재무제표에서 의외의 숫자를 본다. 영업이익은 잘 나왔는데 순이익은 얼토당토않게 적거나 혹은 적자가 나는 경우가 대표적이다. 배경을 알아보면 장부 상의 손실 때문인 경우가 많다. 기업에 직접 질의하면 현금유출이 없는 장부 상의 손실이 일회성으로 잡힌 것이기 때문에 크게 괘념치 말라는 식의 답변을 종종 받는다.
실제로 그렇다. 재고자산평가손익이나 파생상품평가손익은 현금흐름과 무관하다. 기업의 본질적인 사업 경쟁력을 볼 때 이런 장부 상의 숫자들은 외면하는 경우가 많다. 이런 숫자들은 국제회계기준(IFRS)에 의해 매겨졌다. 그런데 이런 '장부 상 숫자'들이 종종 현실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다.
스마일게이트RPG가 라이노스자산운용에 발행했던 전환사채(CB) 사건이 대표적이다. 기업공개(IPO)를 준비하던 스마일게이트는 회계기준을 K-GAAP에서 K-IFRS로 바꿨는데 이 과정에서 2022년 CB에 대한 파생상품평가손실이 5357억원이나 잡혔다.
당해 로스트아크의 '대박'으로 3641억의 영업이익을 냈던 스마일게이트는 1427억원의 순손실을 냈다. 라이노스는 스마일게이트 CB 인수 당시 '순이익 120억원이 찍히면 IPO를 간다'는 조항을 맺었지만 IFRS 변경으로 빚어질 결과까지 예측하지는 못했나 보다. 결국 라이노스는 스마일게이트의 회계기준 변경 한 방으로 엑시트의 길을 잃었고 법적 공방을 준비 중이다.
IFRS의 힘이 현실로 드러난 또 다른 사례는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삼성바이오로직스 사태가 대표적이다. IFRS는 자회사를 종속기업에서 관계기업으로 바꿀 때 다시 한번 자회사를 시가평가해 장부상 평가손익을 잡게 한다. 삼바는 이에 자회사 삼성바이오에피스를 재평가해 2015년 4조5436억원의 평가이익을 잡았고 이는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 관련 사건의 핵심 논란거리가 됐다.
IFRS를 기업이 이용하는 듯한 사례도 있다. 신종자본증권이 가장 먼저 떠오른다. IFRS는 신종자본증권의 경우 발행자의 상환 의무를 매우 약하게 보기 때문에 자본으로 분류한다. 그런데 이 신종자본증권, 통상적으로 5년 마다 다가오는 콜옵션 행사 시기에 발행자가 콜옵션을 행사하지 않으면 대역죄인 취급을 받는다. 2022년 말 흥국생명의 5억달러 외화 신종자본증권 콜옵션 미행사 사태가 대표적이다. 금리 상승으로 신종자본증권의 스텝업 금리가 더 낮아 콜옵션을 행사하지 않으려 했던 흥국생명은 시장의 뭇매를 맞고 고육지책으로 자금을 마련해 기어코 상환했다.
실제로 5년 만기 채권과 다를게 없어 보이는 신종자본증권이지만 IFRS는 이를 자본으로 본다. 그래서인지 요즘 재무구조가 부실하지만 돈은 필요한 기업들이 신종자본증권 발행을 고민한다. 우선 발행만 하면 자본확충 효과가 있어 재무구조가 개선되기 때문이다. IFRS가 시장을 움직이는 거대한 시스템 중 하나라는 점을 다시 한번 실감하게 되는 요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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