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어 프레셔(Peer Pressure)'란 사회적 동물이라면 벗어날 수 없는 무형의 압력이다. 무리마다 존재하는 암묵적 룰이 행위와 가치판단을 지배한다. 기업의 세계는 어떨까. 동일 업종 기업들은 보다 실리적 이유에서 비슷한 행동양식을 공유한다. 사업 양태가 대동소이하니 같은 매크로 이슈에 영향을 받고 고객 풀 역시 겹친다. 그러나 악마는 디테일에 있다. 태생부터 지배구조, 투자와 재무전략까지. 기업의 경쟁력을 가르는 차이를 THE CFO가 들여다본다.
'대체불가능'만큼 강력한 무기가 있을까.해외 경쟁당국이 HD현대중공업과 한화오션 등 쟁쟁한 동종업계 기업의 합병에 어깃장을 놓았던 이유도 독점하는 영역이 너무 큰, 대체불가능한 기업의 탄생이 두려워서다. 반대로 기업은 자기영토 구축과 대체불가능을 목표로 삼는다.
조선 사업은 전체 산업계로 보면 하나의 카테고리이지만 그 범주가 꽤 넓다. 선박 건조만 하더라도 중공업이라는 이름에 걸맞는 대형 선박만 걸러내도 종류가 적지 않다. 조선 3사는 고부가가치·대형 선박, 해양플랜트라는 포트폴리오를 공유하면서도 각자의 무기를 따로 키워왔다.
◇LNG·암모니아 운반선, HD현대와 한화의 라이벌전
HD한국조선해양과 한화오션은 한화오션이 한화의 품에 안긴 올해부터 여러 방면에서 라이벌전을 벌이고 있다. 그중 하나가 고부가가치 선박, 그중에서도 액화천연가스(LNG) 운반선과 암모니아 운반선이다. 암모니아 운반선은 LNG 시대 이후 주류 애너지 운반선으로 기대를 받는 분야다. 조선 3사는 이산화탄소(CO2) 운반선 등 대체연료 운반선에 박차를 가해오다 2020년부터는 암모니아 운반선에 집중해오고 있다.
조선 3사가 고부가가치 선박에 주력할 수 있었던 이유는 국내 조선업계의 성장기와 글로벌 호황기가 맞물린 덕이다. 대형 선박 건조 기술이 있었던 일본과 우리나라에 1980년대부터 2000년대까지 꾸준히 수주가 몰리며 선별 수주가 가능했다. 특히 LNG운반선은 1990년대 국책사업이었다.
LNG운반선 진출은 HD한국조선해양이 빨랐다. 1980년대 초부터 일찌감치 에너지 운반선의 수요 증가를 예상하고 사내에 개발 전담팀을 운영했다. LPG와 LNG에 초점을 맞췄는데 덕분에 1984년 국내 최초로 설계와 건조기술을 개발했다. 수출용 LNG선의 물꼬를 튼 곳도 HD한국조선해양이다.
지금도 잘나간다. HD한국조선해양은 최근 아프리카 소재 선사와 LNG 운반선 2척에 대한 건조 계약을 체결했다. 총 수주금액은 6981억원이다. 올해 147척을 수주했는데 이중 LNG운반선이 39척이다. LPG·암모니아운반선도 26척을 차지한다.
한화오션은 LNG 운반선과 암모니아 운반선에 동시에 드라이브를 걸고 있다. LNG 운반선은 한화오션이 대우조선해양 시절부터 독자적인 영역을 구축한 분야다. 한화오션의 VLCC와 LNG는 1990년대부터 인기몰이를 시작했다. 전체 선박 수주량으로 보면 2000년대 이미 글로벌 1위에 랭크됐다. 2001년 글로벌 LNG운반선 수주량이 47척인데 이중 한화오션만 12척의 주문을 받았다.
한화오션은 LNG선 매출이 컸던 만큼 전환에도 공을 들이고 있다. 이달 14일 한화오션은 초대형 암모니아운반선(VLAC·Very Large Ammonia Carrier) 수주에 성공했다고 밝혔다. 척당 9만3000㎥의 암모니아를 운송할 수 있다. 선박가격은 약 1640억원으로 책정됐다. 고객사는 액화석유가스(LPG) 및 암모니아를 전 세계에 전문으로 운송하는 그리스 나프토마사다.
◇해양플랜트: 바다 밑을 탐험하는 삼성중공업
1998년 세계 최초의 원유시추 선박인 초대형 심해저 원유개발 드릴십(Drillship)의 개발자는 삼성중공업이다. 세계 시장은 더 커서 더 많은 원유를 시추하는 대형 드릴십에 열광했다. 이전까지는 2차대전에 사용했던 전함을 개조한 소형 드릴십이 주를 이뤘다. 삼성중공업은 초대형 드릴십 개발로 2000년 이미 글로벌 시장 점유율 60%를 기록했다.
해양 산업을 떠올리면 통상 수면 위의 일들, 예컨대 해상 운송이나 선박 건조 등이 연상되지만 바다는 수면 아래의 자원도 조선업계에 내주고 있다. 기술의 발전에 따라 또 다른 원료가 동력이 돼 명맥이 이어지는 중이다. 석유에서 가스로 탐사 자원의 폭은 대폭 넓어졌다.
조선업계의 또 다른 먹거리는 이 해양플랜트다. 심해 원유가스 시추선인 드릴십, 부유식 생산저장 하역설비인 FPSO(Floating Production Storage Offloading) 등을 건조한다.
이 분야에서는 삼성중공업이 가장 앞선다는 평가다. 삼성중공업이 드릴십에 긴 시간 천착한 이유는 수익성 때문이다. 고부가가치 선박으로 꼽히는 LNG선박보다 선가가 훨씬 높다. 1척당 적어도 6000억 이상의 값이 매겨진다. 삼성중공업이 2017년 건조해 2019년 인도한 드릴십 1척의 선가가 5억6000만 달러였다.
삼성중공업은 세계 최대 규모 해양플랫폼과 에지나 FPSO를 각각 보유하고 있다. 러시아 사할린 에너지 인베스트먼트와 프랑스 토탈, 러시아 가즈플롯 등에서 수주했다. 해상에서 LNG를 생산하는 FLNG도 삼성중공업의 주력 분야다. 2011년에는 연간 360만톤 생산이 가능한 세계 최초이자 최대 규모의 FLNG를 로열더치셸로부터 수주했다. 페트로나스와 ENI도 삼성중공업의 FLNG 고객이다.
◇넘치는 수주, 높아지는 유가…재료가 좋다
조선 3사의 포트폴리오와 시장 흐름이 맞아떨어지면서 재전성기가 점쳐진다. 글로벌 조선 호황 속에서 특히 국내 기업들이 기지개를 크게 켜고 있다. 선박 건조 부문에서는 수주량과 배값이 모두 받쳐주고 있다. 한화오션 등이 특화된 LNG선은 그중에서도 몸값을 더 올렸다. 해양플랜트 부문에서는 삼성중공업 등 선두주자를 따라잡은 글로벌 기업이 없다. 유가도 힘을 싣는다.
10월 한달간의 선박 발주량을 기준으로 조선 3사의 글로벌 점유율은 62%다. 2위인 중국이 33%로 차이도 크다. 조선 3사의 발주량은 154만CGT(표준선환산톤수)다. 선박마다 규모와 난이도가 달라 공사량을 같은 지표로 평가하기 위해 총톤수에 환산계수를 곱해 CGT를 산출하고 비교한다. 변화는 최근 시작됐다. 1~9월에는 중국의 수주량이 높았지만 10월부터 큰 차이로 눌렀다.
각사별 수주 목표치는 HD한국조선해양이 128.2%, 삼성중공업이 69%, 한화오션이 21.1%를 달성했다. 삼성중공업과 한화오션은 목표치에 아직 미치지 못했지만 기간이 남아있는 데다 목표치일뿐 실제 일감은 향후 3~4년치까지 쌓여있다. 수주잔량은 10월 기준 3988만CGT로 전세계 발주잔량의 30% 수준이다. 2021~2022년 선박 수주량이 워낙 많아 2024년에는 줄어들 전망이지만 기저효과다. 이미 쌓아둔 일감만 처리해도 버틸 수 있는 시간이다.
클락슨리서치에 따르면 신조선가 지수는 올해 3월 165.56포인트에서 10월 176.03포인트까지 치솟았다. 국내 조선사들은 저가 수주를 지양하고 고부가가치 선박 중심의 선별 수주 기조를 세워둬 수혜가 더 클 것으로 보인다. 조선 3사는 올해 3분기 2012년 4분기 이후 11년 만에 동반 흑자를 냈다.
해양플랜트 부문은 전례없는 호황기가 예상된다. 고유가 덕분이다. 해양플랜트 부문은 유가에 실적이 좌우된다. 유가가 상승하면 원유시추는 물론 천연가스 수요도 동반 상승한다. 원유뿐 아니라 가스 부문에서도 삼성중공업이 잘나가고 있다.
삼성중공업은 2015년 5조 규모의 부유식 액화천연가스설비(FLNG) 3척을 공급하는 계약을 맺었다. 5조원은 계약 전년인 2014년 삼성중공업 전체 매출액의 41%에 해당한다. 이때 수주한 3척으로 삼성중공업은 현재까지 전세계에 설치된 FLNG의 75%를 차지하고 있다.
딱 4척이 건조돼 있는데 모두 한국 조선사가 만들었고 이중 3척은 삼성중공업이, 1척은 한화오션의 작품이다. 추가 수주도 기대된다. 초대형 해양플랜트 사업인 아프리카 모잠비크 코랄 2차 FLNG 프로젝트 수주 전에 뛰어들었다. 미국 델핀, 캐나다 시더의 FLNG 기본설계(FEED)도 완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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