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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er Match Up조선 3사

국책사업에 힘입어 바다로 '성공 신화의 출발'

[태동] '회장님' 의지로 큰 HD현대·삼성重, 시작부터 손바뀐 한화오션

허인혜 기자  2023-11-14 16:21:00

편집자주

'피어 프레셔(Peer Pressure)’란 사회적 동물이라면 벗어날 수 없는 무형의 압력이다. 무리마다 존재하는 암묵적 룰이 행위와 가치판단을 지배한다. 기업의 세계는 어떨까. 동일 업종 기업들은 보다 실리적 이유에서 비슷한 행동양식을 공유한다. 사업 양태가 대동소이하니 같은 매크로 이슈에 영향을 받고 고객 풀 역시 겹친다. 그러나 악마는 디테일에 있다. 태생부터 지배구조, 투자와 재무전략까지. 기업의 경쟁력을 가르는 차이를 THE CFO가 들여다본다.
밖에서 부는 바람에 따라 이리저리 함께 흔들리는 것이 동종업계의 숙명이라지만, 이처럼 격랑의 흥망성쇠를 함께 겪은 산업이 있을까. 한때는 '전국 소매치기가 다 몰렸다'는 농담이 떠돌만큼 흥했다. 3사의 작업복이 외상도 가능한 보증수표였던 때가 있었다. 불황도 한번에 닥쳐 수주는 뚝 떨어졌고 꽤 많은 사람들이 그 작업복을 벗게 됐다. 흥할 때가 그랬듯 쇠할 때도 3사 모두 운명을 피하지 못했다. 조선3사 이야기다.

'HD현대중공업, 삼성중공업, 한화오션'이라는 조선3사의 울타리는 꽤 견고하게 오랜 세월을 버텼다. 흥망성쇠와 함께 각 기업의 시간도 쌓였다. 기업은 쌓인 시간만큼 각자의 전략을 강구해 왔다. 과거 글로벌 시장 지표에 따라 운명공동체가 됐던 3사는 각자 다른 전략으로 기지개를 켜고 있다. 사명과 주인은 여러번 바뀌었지만 3사의 뿌리는 1970년대 초반부터 시작됐다.

◇HD한국조선해양, 미포만 백사장과 회장님

조선3사의 출범은 1970년대 초반으로 대동소이하다. 현대와 삼성, 대우가 동시에 뛰어든 셈이다. 3사가 '조선업'의 성공을 예측해서 였을까. 조선업이 4대 국책사업으로 꼽혔기 때문이다. 제2차 경제개발계획이 수립된 1968년이 조선3사의 태동이다.

HD현대중공업은 1970년 출범한 현대건설 조선사업부에서 시작됐다. 본격적인 출항은 1972년 현대조선소 기공식부터다. 기공식을 열기까지 정주영 선대회장이 전세계를 돌며 돈을 빌렸고 '우리는 이런 배를 만든 민족'이라는 거북선 지폐 기지로 결국 영국 런던 버클레이 은행을 공략했다는 일화는 너무 알려져 식상할 정도다.

HD한국조선해양의 첫 인도 선박인 '아틀란틱 배런'의 건조 모습. 사진=HD현대

시작이 국책사업이었다. 정 선대회장이 먼저 원했던 사업은 아니라는 이야기다. 실제로도 정부에서 강하게 요청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의아할 만큼 백방으로 뛴 셈이다. 왜일까. 정 선대회장이 유럽을 찾기 전 먼저 두드렸던 나라들은 미국과 일본이다. 선진국부터 공략해 차관을 요청할 계획이었지만 수년째 여의치 않았다. '해봤어?' 기조의 정 선대회장에게는 이 실패가 오히려 도전정신을 깨우는 계기가 됐을지 모른다.

집념을 보여주는 한 장면은 정 선대회장이 늘 쥐고 다니던 사진으로도 드러난다. 당시만해도 아무것도 없던 울산 미포만의 백사장을 찍은 사진을 지니고 다녔다는 후문이다. 상자 그림에서 숨겨진 양을 보는 것처럼 만입부 위에 세워질 조선소를 그렸을까.

이 백사장 사진으로 따낸 선박주문이 HD현대중공업의 첫 수주다. 그리스 선박왕 리바노스가 요청한 26만톤 급 배 두 척이다. 당시까지 국내에서 만든 가장 큰 선박 팬코리아호의 15배가 넘는 규모였다. 계약금 14억원이 HD한국조선해양의 첫 물꼬가 됐다. 강남 땅값이 평당 5000~1만5000원을 오가던 때다. 14억원을 한국은행에 입금하면서 영국은행 차관을 승인 받는다.

1971년부터 단계적으로 건설된 현대조선소는 1974년 6월 28일 1단계 준공된다. 선박 건조 공간인 1, 2호 도크를 완공하고 여기서 만들 첫 대형 선박 2척의 이름을 애틀랜틱 배런과 애틀랜틱 배러니스로 명명했다. 울산은 아예 이 날을 '울산 조선해양의 날'로 지정해 기념한다.

◇'소비재에서 중공업으로' 43년째 항해 중인 선박1호

삼성중공업도 회장님의 의지와 국책사업이 맞물려 시동을 건 곳이다. 이병철 창업주는 아직 경제가 설익은 1960년대에는 소비재로 입지를 다진 뒤 차츰 중화학공업과 전자까지 발을 넓혀가야 한다고 봤다. 1973년부터 1977년까지의 전략을 담은 제2차 삼성경영 5개년계획에 목표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조선과 중화학의 비중을 높인다는 게 골자다.

그 기조에 따라 삼성중공업은 1974년 설립됐다. 1973년 비서실에 설치한 중공업사업부로 기틀을 닦았다. 출범은 일본의 이지가와지마하리마중공업(IHI)과 합작이었다. 이병철 창업주가 당시 타구치 IHI 회장과 직접 교섭해 50대50 출자로 합작법인 설립을 협의했다.
스미트 로이드 시리즈 건조 당시 거제조선소 제1도크 전경. 사진=삼성중공업

중동전쟁에 따른 오일파동이 발목을 잡으며 잠시 바다 위에 표류했던 조선소 건립은 1977년 우진조선을 인수하며 다시 박차를 가하게 된다. 1979년 거제조선소 제1도크를 완공하고 1980년부터 선박을 인도했다. 1980년 3월부터 거제조선소의 제2기 도크 확장사업이 추진된다. 단일도크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서였다.

제1도크가 완공된 때가 12월, 선박이 인도된 시기가 이듬해 6월이니 반년 만에 첫 인도다. 빨랐던 이유는 완공 전부터 이미 7척의 배를 수주했기 때문이다.

첫 인도선은 석유시추보급선 '스미트 로이드 118'이다. 이 선박은 머스크 헬퍼와 스카우트 피쉬 등을 거쳤다. 주목할 만한 점은 이 배의 노익장. 이 선박은 선사들을 거치며 산자르(SANJAR)라는 이름을 받았다. 글로벌 선박들의 현재 위치를 알려주는 웹사이트 마린트래픽(MarineTraffic)에 따르면 지금도 카스피해에서 정상 운항 중이다.

◇시작이 곧 운명? 불운과 전성기 오간 한화오션 태동기

한화오션의 뿌리 찾기는 꽤 복잡하다. HD한국조선해양과 삼성중공업이 그 사명이나 사업 부문이 바뀌었더라도 각각 현대가와 삼성가라는 뿌리는 흔들리지 않았다면 한화오션은 바뀐 이름 만큼이나 주인도 여러차례 바뀌었다.

시작이 운명을 점쳤을까. 처음부터 순탄하지는 못했다. 한화오션의 가장 첫 시작을 따져보자면 현재 HJ중공업의 전신인 대한조선공사다. 1973년 대한조선공사가 세운 옥포조선소가 한화오션의 출발지가 됐다. 시작은 다른 기업과 비교해 가혹했지만 역시 국책사업이 주춧돌이 된 것으로 보인다.
한화오션 거제사업장 제1도크 전경. 사진=한화오션

1975년말까지 완공을 목표했지만 삼성중공업과 같이 석유파동에 속도가 늦어졌다. 지지부진하던 옥포조선소 사업은 1978년까지도 대한조선공사에 속해있었다.

한화오션에 가장 오랫동안 붙여졌던 사명인 '대우조선해양'은 1978년 8월 경제장관 협의회가 계기가 됐다. 대우그룹이 대한조선공사 옥포조선소를 인수하도록 하면서다. 옥포조선소는 1981년 9월 완공됐다. 1973년 시작된 프로젝트가 기업 두 곳을 거쳐 8년만에 마무리된 셈이다.

옥포조선소 준공 후에는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첫 전성기를 누렸다. 1992년 한국 최초의 전투 잠수함을 건조했고 1993년 세계선박 수주 1위를 달성했다. 첫 번째 영광이 멈춘 건 1999년. 외환위기를 정통으로 맞닥뜨린 대우그룹의 해체다. 이후 긴 시간을 채권단 관리 체제 아래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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