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현대중공업그룹을 만든 순간이 존재했다. 특히 현대오일뱅크 인수, 사업 분할 등 변곡점에서 분투한 인물들이 있었다. 최고재무책임자(CFO) 출신 임원들이다.
현대중공업은 '알짜 계열사'인 현대오일뱅크를 인수하기까지 아부다비 국영석유투자회사(IPIC)와 법정 소송을 겪었다. 김정래 전 경영지원본부장은 기획팀장 시절 분쟁 해결 실무를 맡아 승소로 이끌었다.
조영철 현대제뉴인 대표, 송명준 HD현대 경영지원실장 등은 2010년대 중반 '경영분석 태스크포스(TF)' 주축으로 통했다. 이들은 경영 자구 계획을 짜면서 현대중공업 인적분할의 밑그림도 그렸다. 뒷날 지주회사 체제 출범과 중간지주사 설립의 기틀까지 잡았다.
◇승소로 품에 안긴 오일뱅크 '효자 계열사' 등극현대오일뱅크는 현대중공업그룹의 '효자'로 거론되는 기업이다. 다른 계열사와 견줘보면 압도적으로 높은 실적을 올리기 때문이다. 올해 3분기 누적 매출이 24조6786억원으로, 한국조선해양(12조3607억원)의 2배 수준이다.
지금의 위상을 감안하면 2010년 현대중공업그룹이 현대오일뱅크를 품은 건 '신의 한 수'였다. 하지만 경영권을 확보하기까지 우여곡절을 겪었다. 외환위기 직후 1999년 현대중공업은 자금을 마련키 위해 IPIC에 현대오일뱅크 지분 50%를 매도했다.
IPIC와 현대중공업은 2003년에 계약을 맺었다. IPIC가 배당금 2억달러를 받아갈 때까지 현대중공업이 경영에 관여하지 않는 내용이 골자였다. 이후 IPIC는 2006년 콜옵션을 행사해 현대중공업이 가진 지분 20%를 넘겨받았다.
현대오일뱅크 경영권을 둘러싼 분쟁은 2007년에 수면 위로 떠올랐다. IPIC가 배당을 1억8000만달러까지 받고 추가 수령을 하지 않은 대목이 문제로 불거졌다. 설상가상으로 IPIC는 현대오일뱅크 매각을 경쟁 입찰 방식으로 진행하면서 국내 대기업과 접촉했다.
현대중공업은 IPIC가 배당을 받아가지 않는 건 현대중공업을 경영권 행사 주체에서 배제하려는 의도가 짙은 만큼, '계약 위반'이라고 판단했다. IPIC가 지분을 팔 경우 현대중공업 측에 우선매수권을 부여한다는 조항 역시 매각 추진 국면에서 무시됐다고 인식했다.
2008년 3월 현대중공업은 계약을 근거로, IPIC가 보유한 현대오일뱅크 지분 70% 전량을 매수할 권리를 행사키로 결정했다. 싱가포르 국제상업회의소 산하 국제중재재판소에 제소도 병행했다. IPIC가 우선매수권을 수용하지 않을 상황에 대비한 조치였다.
소송 실무를 총괄한 인물은 김정래 전 현대중공업 사장이었다. 당시 현대중공업 기획팀장(전무)이자 현대오일뱅크 이사로 몸담았다. 김 전 사장은 2005년 현대중공업 기획담당을 맡은 뒤부터 신사업 구축과 인수·합병(M&A) 업무에 매진했다.
IPIC는 김 전 사장을 현대오일뱅크 이사에서 해임하면서 맞대응했다. 2009년 11월 국제중재재판소는 IPIC가 계약을 위반했다면서, 보유한 현대오일뱅크 지분 70%를 현대중공업으로 매각하라고 판결했다.
하지만 IPIC는 "한국 법원의 결정이 있어야 중재 판정 효력이 발생한다"며 국제중재재판소의 판결을 수용하지 않았다. 현대중공업은 2009년 12월 서울중앙지방법원에 소송을 제기했다. 국제중재재판소의 중재 판정 강제 집행을 허가해달라고 청구했다.
국내 사법부 재판에서도 현대중공업의 승소로 결론 났다. IPIC는 2010년 8월 현대중공업에 보유 주식 전량을 처분했다. 현대중공업은 당시 시세보다 25% 저렴한 가격인 주당 1만5000원에 현대오일뱅크 지분을 사들여 그룹 계열사로 편입했다. 인수 대금 2조5000억원은 금융권 차입과 기업어음(CP) 발행으로 충당했다.
현대오일뱅크 인수를 계기로 그룹의 사업 포트폴리오가 한층 넓어졌다. M&A 이전 그룹의 전체 매출에서 조선·해양 사업이 차지하는 비중은 72%였다. 현대오일뱅크를 품에 안은 뒤 비율은 50%로 낮아졌다.
법정 공방의 최일선에서 움직였던 김 전 사장의 이후 커리어는 어땠을까. 기획팀장에서 CFO 격인 경영지원본부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이후 △현대종합상사 사장 △현대중공업 사장 △한국석유공사 사장 등의 요직을 거쳤다.
◇'非조선 계열사' 분리, 지주회사 체제 완성2010년대 현대중공업그룹은 '조선업황 부진에 따른 대응'이라는 도전 과제에 직면했다. 권오갑 회장은 그룹 기획실장으로 재직하던 2014년에 경영분석 TF를 구성했다.
조직에 포진했던 인물들은 현대중공업그룹의 핵심 임원으로 자리매김했다. 조영철 전무는 현대제뉴인 대표로 영전했다. 송명준 상무는 HD현대·한국조선해양 경영지원실장(부사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TF는 2016년에 경영 개선 계획을 수립해 △비주력 계열사 매각 △자산 처분 △인력 감축 등의 조치를 실행했다. 현대중공업그룹은 1년 6개월 동안 3조9100억원 규모의 금액을 확보하는 효과를 거뒀다.
자구 노력의 화룡점정은 '사업 분할'이었다. 2016년 11월 현대중공업 이사회는 기존 회사를 △조선·해양·엔진기계 △전기·전자 △건설 장비 △그린 에너지 △로봇 △서비스 등으로 나누는 방안을 확정했다. 비(非)조선 사업이 소외돼 투자가 원활치 않은 만큼, 경영 비효율을 해소하자는 인식이 대두됐기 때문이다.
2017년 4월까지 현대중공업에서 현대일렉트릭, 현대건설기계, 현대로보틱스, 현대그린에너지, 현대글로벌서비스 등 5개사를 분리했다. 인적 분할에 힘입어 7조3000억원이던 현대중공업 차입금이 3조9000억원 수준으로 줄어들고, 부채비율이 100% 아래로 내려갔다. 신설 계열사로 일부 차입금이 넘어간 영향이 작용했다.
사업 분할을 계기로 현대중공업그룹은 순환출자 고리를 해소하는 데 속도를 냈다. 공정거래위 권고를 이행하는 동시에 기업 지배구조 투명성을 끌어올리는 취지에서 해결해야 할 숙제였다.
현대로보틱스를 그룹 지주회사로 점찍고 간판을 현대중공업지주(지금의 HD현대)로 바꿨다. 정기선 사장이 지주사 지분을 사들이면서 '오너 3세 경영'의 기반도 닦았다.
중간지주사도 속속 만들었다. 2019년 조선 부문을 총괄하는 한국조선해양이 설립됐다. 2021년에는 건설기계 분야를 이끄는 현대제뉴인이 출범했다. 경영분석 TF의 활약상은 지주회사 체제 완성으로 마침표를 찍었다. 현대중공업그룹의 변신에는 CFO 출신 인물들의 헌신이 녹아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