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 장래희망을 적을때 의사, 교사, 판사, 과학자 등이 상위권을 차지했다. 어린 시절 무엇을 알았겠나 싶지만 그때도 ‘사자 직업’이 좋다는 것은 어렴풋이 알았던 것 같다. 수십 년이 흐른 지금 학생들의 장래희망은 얼마나 달라졌을까 싶어 지난해 교육부가 조사한 결과를 찾아보니 별반 다르지 않았다. 교사, 의사 등이 여전히 상위권 단골손님이다. 크리에이터, 웹툰 작가 등 같은 신종 직업들도 세월의 흐름을 반영하며 상위권에 등장했지만 여전히 ‘사자 직업’의 위력은 굳건하다.
성인이 되어 밥벌이를 시작하고 나니 더 이상 누군가 장래희망을 묻지도, 밝히지도 않는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지배구조, 이사회, 사외이사를 취재한다고 말하면 뜻밖에도 자신의 장래희망을 털어놓는 이들이 있다. 그들의 대답은 또 다른 ‘사자 직업’, 바로 ‘사외이사’다.
사외이사가 어른들의 장래희망으로 떠오르는 이유는 의외로 단순하다. 일 년에 몇 차례 열리는 이사회에 참석만 하면 되고 고액의 연봉을 받을 수 있다는 인식 때문이다. 한 기업의 경영진으로서 받는 의전과 다양한 혜택도 무시할 수 없다. “적게 일하고 많이 버세요”라는 말이 덕담으로 통하는 요즘 같은 시대에 사외이사는 어른들의 장래희망으로 꼽힐만 하다.
그러나 사외이사의 자리가 그리 쉽지만은 않다. 법적 책임과 그로 인한 무게감을 이유로 들어오는 제안을 거절하는 이들도 적지 않다.
한 사외이사는 과거 이사회에서 내린 결정으로 소송에 휘말린 적이 있다고 한다. 결과적으로 문제가 되지는 않았지만 그 경험은 그를 오랜 시간 괴롭혔다. 최근 경영권 분쟁으로 주목받고 있는 고려아연의 사외이사들 역시 이사회 결정 때문에 소송의 대상이 됐다. 회사 측은 해당 결정이 법적 검토를 거친 것이라 문제될 것이 없다는 입장이지만 지난한 소송의 과정이 끝날 때까지 그 부담감은 오롯이 그들의 몫이다.
앞으로 사외이사의 책임이 더 무거워질 가능성도 크다. 더불어민주당이 최근 발의한 상법 개정안은 이사의 충실 의무를 회사뿐만 아니라 주주에게도 확대하는 것이 골자다. 사외이사는 ‘독립이사’로 이름이 바뀌고 이사회 내 사외이사 비율도 기존의 4분의 1에서 3분의 1로 늘어난다.
사외이사는 주어지는 보상 뿐만 아니라 전문성을 살릴 수 있다는 점에서도 매력적인 자리다. 하지만 그만큼 무거운 책임과 리스크가 따르는 자리이기도 하다. 결코 쉽거나 가볍게 여겨져서는 안 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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