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프라이빗 에퀴티(Private Equity)가 태동한 지 20년이 지났다. 글로벌 PE의 100년 역사와 비교하면 그리 길지 않은 시간이지만 여러 하우스들의 다양한 시도와 제도 개선 끝에 지금의 기관전용 사모펀드의 위용을 갖췄다. PE는 이제 국내 자본시장과 산업에서 없어서는 안될 중요한 플레이어로 자리잡았다.
물론 그사이 좋은 시간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2022년까지 앞서 10년간 풍부한 유동성에 부흥기를 보낸 PE는 최근 2년 사이 법개정과 고금리 여파로 그 여느 때보다 어려운 시간을 넘기고 있다. 펀드레이징 양극화가 심해지면서 시장 재편의 움직임도 나타나고 있다.
어려운 시간을 보내고 있지만 향후 국내 자본시장과 산업에서 맡을 역할이 더 커진다는 전망에는 이견이 없다. PE의 지난 20년을 돌아보며 PEF협의회 제7대 회장을 맡고 있는 라민상 프랙시스캐피탈 대표
(사진)를 만나 국내 PE시장의 전망과 과제를 들어봤다. 라 대표는 베인앤컴퍼니를 거쳐 2013년 프랙시스캐피탈을 창업하는 등 현재까지 약 15년간 PE업계에 몸담고 있다.
◇ 기업 승계 과정 주목, ‘로컬 PE’에서 ‘글로벌 PE’로 라 대표는 지난 20년간 국내 GP와 LP가 서로 발전을 도우며 PE시장의 성장을 이끌었다고 바라봤다. PE 제도 도입 초기 ‘역할 탐색’의 시기를 거쳐 금융 위기 이후 다양한 메자닌 투자에 나서면서 구조화된 투자를 발전시켰다. 이후 2022년까지 약 10년 동안은 저금리 기조를 발판 삼아 PE시장은 양적·질적으로 성장했다. 2004년 단 2개에 불과했던 PEF는 2022년 1000개를 넘었고, 약정액은 작년 1분기 기준 134조원을 넘어섰다.
라 대표는 그간 충분한 투자 경험을 쌓은 PE들이 향후 국내 기업들의 승계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게 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라 대표는 “아직 한국 기업은 1세대 창업자 또는 그 가족이 경영하는 기업들이 많지만 해외 사례에서와 같이 주식회사 제도가 성숙되면서 소유와 경영의 분화는 피할 수 없다”며 “PE와 협력한다면 단순 지분 승계에 의한 소유가 아닌 경영능력이 검증된 후계자를 발굴하고 경영권을 넘기는 능력주의 방식으로 승계 문제의 해법을 찾을 수 있게 된다”고 말했다.
경영권 승계과정에서 PE의 적극적 참여는 일부 과점주주만 독점했던 이익을 궁극적으로 국민들과 나누는 효과도 발생한다. 라 대표는 “PE의 출자자는 국민연금을 포함한 국내 주요 연기금, 공제회들”이라며 “PE가 투자수익을 창출하면 최종수익자는 결국 국민들이기 때문에 PE의 이익은 공익적인 목적과도 연계된다”고 말했다.
국내에서 충분히 성장한 PE들이 장기적으로는 국내를 넘어서 글로벌 시장에서 기회를 잡을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도 보였다. 국내 PE들은 해외 진출을 통해 국내에서는 아직 여물지 않은 산업들을 일찍 접하고 투자 기회를 발굴할 수 있다.
라 대표는 “국내 산업계에서 수출이 핵심인 산업은 많았지만 아직 자본시장에서 국내 자본을 들고 해외 기업이나 자산에 투자하는 사례가 많지 않다”며 “최근 콘텐츠, 커머스, 소비재 등의 산업에서는 애초에 해외 소비자를 겨냥한 기업들이 나오고 있다는 점을 보면 향후 PE업계에서도 해외 기업 인수를 처음부터 기획하는 하우스들이 등장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글로벌 진출이 꼭 필요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향후 글로벌 PE와 경쟁해야할 때가 왔을 때 국내 PE의 글로벌 경쟁력은 중요한 평가 지표가 될 것이라는 전망이다. 라 대표는 “아직 국내 PE들이 글로벌 기업을 인수하는 사례가 흔치 않지만 한국은 좋은 LP풀이 있어 실력이 좋은 운용사가 성장하기에 좋은 터전”이라며 “한국의 PE들이 글로벌 톱티어 PE들과 대적할 만한 수준이 돼야만 향후 국내 연기금들의 기대 수익률이 한층 높아진 미래에 다시 선택 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 개인 투자자 참여 위한 마일스톤 필요, 컨티뉴에이션 펀드 성장 기대 2021년 자본시장법 개정은 국내 PE들에게 적지 않은 변화를 가져왔다. 핵심은 개인 투자자가 참여 가능한 일반 사모펀드와 기관만 투자할 수 있는 전용 사모펀드의 분리다. 라임자산운용·옵티머스자산운용 등의 사태가 터지면서 개인 투자자를 보호하기 위해 법개정이 이뤄졌지만 개인 투자자가 경영참여 PEF에 투자할 수 있는 방법은 막히게 됐다.
라 대표는 개인 투자자가 다시 PE 시장에 참여할 수 있는 단계적 마일스톤을 마련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우리 국민들은 ’투자의 민족’이라 할 만큼 투자에 관심이 많기 때문에 향후 참여를 열어준다면 큰 호응을 얻을 것”이라며 “아직 제도 개편은 어렵지만 장기적으로 개인 투자자를 다시 PE 시장으로 안전하게 끌어당길 수 있는 단계적인 방법에 대한 당국의 고민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개인 투자자의 참여를 위해서는 다양한 방법을 고민할 수 있다. ‘재간접펀드(Fund of Funds)’도 하나의 사례가 될 수 있다. 여러 펀드에 분산투자해 위험을 최소화하는 재간접펀드를 통한다면 개인 투자자들의 리스크를 낮출 수 있다.
장기적으로는 상장된 PE들을 대상으로 만들어진 ETF에 투자하는 방식도 고민할 수 있다. 현재 국내 PE 중에서 상장된 곳은 스틱인베스트먼트가 유일하다. 하지만 장기적으로 PE의 승계 과정에서 기업공개를 선택하는 곳들이 늘어날 수 있다. 블랙스톤, 칼라일, KKR 등은 이미 상장돼있으며 이들을 기초자산으로 삼은 ETF도 판매되고 있다.
LP 인식 변화에 따른 컨티뉴에이션 펀드(Continuation Fund)의 성장도 기대된다. 컨티뉴에이션 펀드는 위탁운용사(GP)가 자산을 장기간 보유하기 위한 목적으로 기존 출자자 대신 새로운 LP를 모집해 해당 포트폴리오를 옮겨 담는 것을 말한다. 해외에서는 이미 활발한 투자 방법이지만 국내에서는 아직 사례가 많지 않다. 2022년 한앤컴퍼니가 쌍용C&E 컨티뉴에이션펀드 조성에 성공했지만 여전히 매각에 ‘실패’한 포트폴리오를 옮겨 담는다는 부정적 인식이 짙기 때문이다.
라 대표는 “과거 세컨더리딜에 대한 인식도 이와 비슷했다”며 “향후 10년 동안 우량 자산에 대한 컨티뉴에이션 펀드 결성은 증가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PE를 향한 부정적 인식은 어떻게 바꿀 수 있을까. 지난 20년간 PE들이 산업계와 자본시장에서 ‘부가가치 창출자’로서의 역할을 톡톡히 해왔지만 여전히 ‘기업 사냥꾼’이라는 부정적 인식이 남아있다.
라 대표는 PE 인식 변화와 관련해서는 글로벌 PE들의 사례를 들었다. 미국에서는 PE 1세대 창업자들이 다양한 사회공헌 활동과 막대한 기부로 PE 인식을 바꾸는 데 일조했다. 블랙스톤 스티븐 슈워츠먼 회장은 MIT에 3000억원 이상을 기부해 그의 이름을 딴 단과대도 설립됐다.
PE가 기업을 인수함으로써 생기는 긍정적인 효과도 언급했다. 라 대표는 “PE가 기업을 인수할 때 인력 구조조정 등 부정적 이미지가 아직도 남아있다”며 “하지만 이와 달리 오히려 투명한 보상 체계 확립, 기업의 매출, 이익 증가를 통한 고용 증가 효과가 더 크다”고 강조했다. 더불어 PE의 '고객'은 국내 연기금, 공제회 등 공적 기금이기 때문에 어느 운용업보다 ESG 투자에 앞서있다는 설명이다. IMM PE가 2013년 인수했던 ‘할리스 커피’가 대표적이다. IMM PE는 할리스커피 인수 이후 채용을 확대했으며 '장애인고용 우수사업주'로 선정되기도 했다.
◆PEF운용사 협의회는… PEF운용사 협의회는 국내 PEF 운용사들을 대변하는 공식 창구로 2013년 출범했다. 현재 91곳의 회원사가 참여하고 있으며 운용자산(AUM) 규모는 약 93조원에 이른다. 이는 국내 PEF시장의 70% 가량으로 PEF업계를 대표하는 기관으로 자리매김했다.
출범 당시 이재우 보고펀드(현 VIG파트너스) 대표가 첫 회장직을 맡았고, 김광일 MBK파트너스 대표, 곽대환 스틱인베스트먼트 대표, 김영호 IMM프라이빗에쿼티 대표, 김수민 UCK파트너스 대표, 강민균 JKL파트너스 대표가 회장직 이어왔다. 지난해 10월 라민상 프랙시스 대표가 회장으로 취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