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45억원'. SK이노베이션이 3개월 만에 감축한 차입 규모다. 대규모 자금을 단기에 조달하기 위해 기획한 조단위 유상증자의 성과답게 상당하다. 문제는 앞으로다. 채무 상환에 배정된 돈은 사실상 다 지출했다고 보는 게 맞다. 돈 들어올 구멍이 또 있을지, 계열사들을 지원할 여력은 있는지, 새 수장 박상규 총괄사장은 어떻게 대처할지 등 회사가 마주한 고민을 다시 곱씹게 한다. SK온 수혈과 유상증자 후 바뀐 SK이노베이션은 어떤 상황일까. 더벨은 전환점이라 부를 수 있는 SK이노베이션의 사업적·재무적 변화를 진단해 본다.
지주사 곳간은 얼마나 막강한 자회사를 보유했는지에 달렸다. 자회사 실적이 좋을수록 주머니에 더 많은 배당금이 들어오는 것은 사실 당연하다.
연결 자산총계만 80조원에 달하는 SK이노베이션은 어떨까. 고유가를 기반으로 지난해와 올해 석유화학 자회사의 실적이 확 좋아졌다. 그만큼 SK에너지·SK트레이딩인터내셔널 등 한동안 자취를 감췄던 배당 화수분의 귀환을 충분히 기대해 볼 만한 상황이다.
◇고군분투 중인 'SK엔무브'
SK이노베이션은 2011년 SK에너지의 기업 분할 당시 중간 지주사로 거듭났다. 이때를 기점으로 다른 지주사와 같이 배당수익의 비중이 매우 높은 수익구조를 갖추게 됐다.
SK이노베이션의 올해 3분기 말 별도 기준 영업활동현금흐름은 4538억원이다. 이 중 배당수익이 3870억원으로 전체의 85%를 차지했다. SK이노베이션은 SK에너지(100%), SK지오센트릭(100%), SK온(89.5%), SK엔무브(60%), SK인천석유화학(100%), SK IET(61.2%), SK어스온(100%) 등의 지분을 보유하고 있어 이들로부터 배당수익을 거두고 있다.
특히 SK엔무브로부터 얻는 배당수익의 비중이 절대적이다. SK엔무브는 매년 4500억원 안팎의 배당을 실시하고 있는데 이 가운데 60%가 SK이노베이션으로 향하고 있다. SK엔무브의 지난해 배당금 지급 규모는 6170억원으로, 이중 SK이노베이션의 몫은 3702억원이었다. 3702억원은 올해 SK이노베이션의 배당수익(3870억원)의 95%를 차지하고 있다.
이유는 간단하다. SK엔무브를 제외한 다른 계열사들의 재무 안정성이 확보되지 않아서다. 그간 고배당 기조를 보였던 SK에너지는 2020년 이전까지 매년 1조원 안팎의 배당금을 SK이노베이션에 안겼다. 그러나 코로나19로 2조원 가까운 적자를 낸 2020년 배당금을 3000억원으로 줄였고 이듬해부터는 아예 배당을 실시하지 않고 있다.
투자를 시작하면서 배당 여력이 낮아진 곳도 있다. 2015년부터 2019년까지 1000억원대를 유지해 오던 SK지오센트릭의 자본적지출(CAPEX) 규모는 2020년대에 접어들며 적게는 2200억원, 많게는 4000억원까지 확대됐다. 2018년 한때 8000억원을 배당한 SK지오센트릭이 CAPEX가 확대된 2020년부터 아예 배당을 집행하지 않는 이유다.
◇부활 'SK에너지'…다시 배당 화수분 될까
SK엔무브가 홀로 고군분투하고 있는 모습이지만 역부족이다. SK이노베이션은 2021년 7월 중장기 경영전략을 발표하며 향후 2025년까지 모두 30조원을 투자한다는 계획을 밝혔다. 그린 비즈니스와 연구개발(R&D) 영역 등 자체 투자를 포함해서다.
중장기 투자는 현재진행형이다. 관건은 현주소다. 이런 상황에서 유가 및 정제마진의 호조가 이어진 지난해 이후 석유화학 자회사의 실적이 확 좋아졌다. 이들이 배당 여력을 다시 갖췄다는 의미다.
특히 SK에너지가 눈에 띈다. SK에너지는 지난해 정유업 호황으로 1조4650억원에 달하는 순이익을 올렸다. 올해는 순이익이 2300억원에 머물고 있지만 정유사 수익 지표인 정제마진은 현시점 배럴당 10달러선을 유지하고 있다. 통상 배럴당 4∼5달러를 정제마진의 손익분기점으로 본다. 이에 4분기에도 견고한 실적을 이어 나갈 것으로 전망된다.
SK트레이딩인터내셔널의 상황도 안정적이다. 계열사 석유 제품 수출·원유 수입을 맡는 SK트레이딩인터내셔널은 고유가 시기인 작년 4100억원의 순이익을 올렸다. 비상장사라 올해 실적은 아직 알 수 없지만 이 회사가 2021년까지 4000억원 안팎의 배당을 꾸준히 집행했던 곳이라는 점에서 호실적에 따른 배당 재개 가능성이 점쳐진다.
SK지오센트릭의 경우 올해도 현금을 최대한 비축할 가능성이 높다. 총투자금 1조8000억원 규모의 울산 ARC 착공이 올해 하반기에 시작됐다. 2019년 한때 SK이노베이션에게 2000억원의 배당금을 안겼던 SK인천석유화학도 아직 상황이 어렵다. 작년 580억원의 순손실을 냈고 올해 3분기까진 약 1100억원의 순손실을 기록 중이다.
SK온과 SK IET 등 이차전지 계열사를 얘기하는 건 시기상조로 여겨진다. 시설투자가 한창인 데다 아직 순손실을 내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자원개발 사업을 담당하는 SK어스온은 지난해 230억원의 순이익을 올린 회사이지만 석유개발 사업이 진행되고 현금 창출이 본격화하는 내년 이후에나 가능성을 점칠 수 있을 전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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