격변이 예고된 올해 SK그룹 인사 이후 내년부터 SK그룹 내 최고재무책임자(CFO)들의 존재감이 대폭 커질 것으로 보인다. SK그룹을 이루고 있는 반도체·배터리 등 주요 사업들의 투자 성과가 미미해 CFO들의 자금 관리·감독 기능의 필요성이 커지면서다. 최고경영자(CEO)들을 향한 CFO들의 감시와 견제 기능도 강화할 것으로 보인다.
6일 재계에 따르면 최태원 회장은 최근 그룹 CEO세미나 등 최고경영진들이 모인 자리에서 CEO들을 강하게 질책했다. 배경은 최근 이뤄진 대규모 투자들에 대한 부진한 성과다. 솔리다임 인수와 배터리 관련 투자 등 그룹의 미래를 걸고 단행한 투자들이 성과가 부진하면서 올해 내내 SK그룹의 실적에 발목을 잡아왔다.
최 회장은 이 과정에서 향후 그룹 CEO들이 대규모 투자를 결정할 때 항상 CFO들의 검토를 받으라는 주문을 했다고 전해진다. 기업의 돈줄을 쥐고 관리하는 CFO들이 CEO를 견제하고 감시할 수 있는 권한이 향후 강해질 전망이다.
SK그룹의 최근 대표적인 대규모 투자는 SK하이닉스의 솔리다임 인수합병(M&A)이다. 낸드플래시 사업을 강화하고자 2020년 10월 10조원을 들여 인수했지만 인수 시점과 맞물려 반도체 다운사이클이 시작되면서 막대한 규모의 영업손실을 내는 처치가 됐다. 올해 1·2분기 낸드에서만 각각 약 2조3000억원, 2조8000억원의 영업손실이 발생했다.
배터리 사업도 아직 갈 길이 멀다. 3분기 누적 연결 자본적지출(CAPEX)로만 약 6조8000억원을 썼다. 4분기를 포함해 향후에도 배터리 시장 점유율 확보를 위해서는 조원대 투자가 불가피하다. 다만 올해 목표했던 손익분기점(BEP) 달성에 실패하는 등 기대만큼의 투자 성과가 따라주지 못했다.
실적 한파와 피할 수 없는 대규모 투자, 예전보다 고갈된 현금 상황 등 삼중고 속에서 최 회장은 CFO들의 역할 강화를 통해 투자와 재무의 균형점을 찾아갈 것으로 보인다.
재계 관계자는 "재무라인을 포함해 내년부터 감사의 역할도 SK그룹 내에서 중요해질 것"이라면서 "CEO들이 투자를 결정하기 전 CFO의 검토 작업이 필수적으로 선행될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내년 이후 CFO들의 계열사 이사회 등판 가능성도 점쳐진다. 현대차그룹이나 LG그룹의 경우 전통적으로 CFO들이 이사회에 참여해왔지만 SK그룹의 경우 CFO들은 미등기임원으로 근무하는 경우가 많았다.
SK그룹에서 CFO가 이사회에 등재된 사례는 지주사 SK의 이성형 사장과 SK온의 CFO 김경훈 부사장이다. 이 사장은 작년 말 사장 승진 이후 올해 초 주주총회를 거쳐 SK의 사내이사로 선임됐다. 김 부사장 역시 올해 초 SK온의 사내이사로 부임했다.
SK E&S의 김형근 부사장과 SK에코플랜트의 조성욱 부사장도 자사 이사회에 사내이사로 등재돼있다. 두 기업은 SK의 자회사이자 비상장사라는 공통점이 있다.
SK그룹에서 주요 사업 상장사인 △SK이노베이션 △SK스퀘어 △SK텔레콤 △SK하이닉스 △SKC △SK네트웍스 등 기업들의 CFO들은 모두 미등기임원 상태다. '따로 또 같이'라는 모토로 계열사 독립경영 체제를 중시하는 SK그룹 특성상 지주사와 계열사의 이사회 구성에도 차이가 있었다.
내년부터 CFO의 권한이 강해지면 각 사의 CFO들의 이사회 등판 가능성도 높아진다. CFO가 이사회에 직접 참여할 경우 주요 경영 현안을 CFO가 직접 검토하고 결정할 수 있는 권한이 부여되기 때문에 CEO의 감시·견제 역할도 이전보다 커질 것으로 분석된다.
재계 관계자는 "SK그룹은 타 그룹과 달리 대표이사와 모회사의 기타비상무이사들, 사외이사들로만 이사회를 구성하는 케이스가 많았다"라면서 "기존에 CFO들이 이사회에 들어갈 자리가 부족했는데 올해 이후 권한이 커질 경우 이사회 내에서도 존재감이 커질 수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