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조기업에 재고자산은 '딜레마'다. 다량의 재고는 현금을 묶기 때문에 고민스럽고, 소량의 재고는 미래 대응 능력이 떨어진다는 점에서 또 걱정스럽다. 이 딜레마는 최근 더 심해지고 있다. 공급망 불안정에 따른 원재료 확보의 필요성과 경기침체에 따른 제품 수요의 불확실성이 샌드위치 형태로 기업을 압박하고 있기 때문이다. 더벨은 기업들의 재고자산이 재무에 미치는 영향 등에 대해 살펴본다.
선박엔진 제조사 HSD엔진이 조선 업사이클의 수혜를 보며 대량의 수주잔고를 쌓고 있다. 이에 맞춰 재고자산도 불리고 있다. 그러나 올들어 아직 매출의 증가세로 이어지지는 않는 중이다.
재고자산과 매출의 성장이 엇갈리는 사이 재고자산 회전 효율은 저하되는 모습이다. 다만 선박엔진 출하량이 늘어나는 4분기부터는 본격적으로 재고를 소화해 가며 매출 증가세를 동반할 것으로 전망된다.
HSD엔진은 2023년 3분기 말 기준 재고자산 총계가 3741억원으로 집계됐다. 전년 동기보다 54.6% 늘었다. HSD엔진 재고자산은 2021년 1분기에서 2분기로 넘어갈 때 1729억원에서 1519억원으로 210억원 감소한 이후 9개 분기동안 단 한 차례도 꺾이지 않고 증가세를 유지 중이다.
이는 HSD엔진의 일감이 그만큼 풍부해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2020년 말 7725억원에 불과했던 수주잔고는 2021년 말 1조1339억원, 2022년 말 2조1604억원, 올해 3분기 말 2조8418억원을 기록 중이다. 일감이 정기적으로 들어오지 않는 수주산업 특성상 분기별로 부침은 있으나 증가세는 뚜렷하다.
이처럼 HSD엔진은 쌓이는 일감의 소화를 위해 재고자산도 불리는 중이다. 문제는 이러한 준비가 올들어 매출로 이어지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HSD엔진은 지난해 4분기 매출 2242억원을 거둔 뒤 매출이 조금씩 하락하며 올해 3분기에는 1876억원을 기록했다.
이에 지난해까지는 3회 이상을 유지했던 재고자산 회전수(연환산 매출원가를 기초재고와 기말재고의 평균으로 나눈 값) 역시 올해는 1분기 2.9회, 2분기 2.5회, 3분기 2.3회로 낮아지고 있다. 재고자산 운용 효율성이 둔화하고 있다는 말이다.
이러한 재고 운용 비효율화의 원인은 무엇일까. HSD엔진 관계자는 "조선사 측 요청으로 3분기 공급 예정이었던 물량 중 일부의 납기가 4분기로 이연됐다"고 설명했다. 일시적 현상이라는 말이다. 이는 재고자산의 유형별 추이에서도 나타난다.
납기에 맞춰 엔진을 제작한 뒤 곧바로 조선사에 인도하는 사업 구조상 HSD엔진은 기본적으로 상품이나 제품의 재고는 없다. 일감이 증가 추세인 만큼 작업 중인 물량을 의미하는 재공품과 원재료의 재고 규모는 지난해 3분기부터 꾸준히 증가 중이다.
주목할 지점은 전체 재고자산에서 원재료가 차지하는 비중이다. 이전에는 30% 중~후반을 유지하던 이 지표가 올해 2분기 44.6%, 3분기 47%로 재차 높아졌다. 이 시기 원재료의 작업 전환이 뒤로 미뤄지는 생산 병목현상이 발생했다는 의미다.
이연된 물량이 4분기 예정대로 인도된다면 문제는 없다. 오히려 4분기 공급 예정물량에 이연 물량이 더해지며 매출의 큰 증가세를 기대할 수도 있다. HSD엔진 측에서도 4분기에는 매출이 늘어날 것이라고 내다보고 있다.
재고 운용 효율이 일시적으로 둔화한 데 따른 리스크는 없을까. 재고자산의 증가는 운전자본 증가를 야기해 현금흐름을 경색시키는 요인이다. 다만 HSD엔진은 이 리스크를 잘 방어해내는 중이다.
이 기간 HSD엔진은 재고자산 증가만으로 영업활동에서 1087억원의 현금 유출이 발생했다. 그러나 확정계약자산의 매출 전환과 계약부채(선수금) 증가를 통해 1124억원의 현금을 창출하는 등 '영업활동 관련 자산 및 부채의 변동(운전자본 변동)'으로 오히려 304억원의 플러스 현금흐름을 만들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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