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그룹은 정말로 공모채 발행을 안합니다"
삼성그룹을 맡고 있는 증권사 IB(기업금융) 커버리지 담당자의 푸념이다. 삼성전자처럼 돈 많은 전자 계열사는 물론 배터리 투자가 급한 삼성SDI도 회사채 발행보다는 자체 자금이나 은행 차입을 활용해 필요한 돈을 쓴다.
하지만 회사채 발행이 필요한 계열사도 있다. 삼성중공업은 조선업 불황을 버티는 동안 사모채를 발행하며 자금을 마련해왔다. 하지만 조선업 호황기에 접어들어 발행 여건이 개선됐음에도 여전히 공모채를 택하기 조심스러워 한다. HD현대중공업 같은 경쟁 조선사는 공모채 흥행 기조가 뚜렷한데 별다른 움직임이 없다.
다음달 만기가 도래하는 사모채도 공모채 발행 대신 상환을 검토하고 있다. 신용등급도 'BBB+'급까지 높아졌지만 조달에 보수적인 그룹 기조가 반영됐다는 게 IB업계의 평이다.
◇조선업 호황·신용도 높아져도…공모시장 복귀 '아직' 21일 투자은행(IB)업계에 따르면 삼성중공업은 다음달 만기 도래하는 사모채 250억원에 대한 상환 의사를 IB업계에 전달했다. 지난해 말 연결 기준 6000억원에 육박하는 현금 및 현금성 자산을 가지고 있어 상환에는 여유가 있다.
상환보다 눈에 띄는 건 삼성중공업이 공모채 시장을 떠나있던 시간이다. 2015년 2월 NH투자증권을 주관사로 5000억원을 마련한 이후 벌써 10년 가까이 공모채를 발행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채권을 아예 발행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이후 사모 시장으로 선회해 지난해에만 2250억원의 사모채를 발행했다.
삼성중공업은 2015년부터 2022년까지 조선업 장기 불황으로 인해 줄곧 영업적자를 기록했다. 유가 하락으로 회사가 수주한 드릴십(심해 원유 시추선)이 악성 재고로 변하면서 2015년 1조5000억원이 넘는 적자를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코로나19 이후 해상 물동량 증가로 수주가 늘면서 지난해 9년 만에 흑자 전환에 성공했다. 지난해 영업이익은 2333억원이었다.
신용평가업계에서도 긍정적으로 반응했다. 나이스신용평가는 지난해 12월 삼성중공업의 장기신용등급을 기존 'BBB, 긍정적'에서 'BBB+, 안정적'으로 한 노치(Notch) 높였다. 나이스신용평가는 "2022년부터 고선가 수주 물량 공정 진행에 따라 수익성이 개선되는 추세"라며 "수주잔고를 바탕으로 현금창출력이 향상될 것으로 예상된다"고 밝혔다.
오랜만의 조선업 호황에 공모채 수요예측에 나선 조선사에 대한 양호한 투심이 확인된 사례도 있다. 지난 1월 HD현대중공업이 1000억원 규모 공모채 발행을 위해 수요예측을 실시했는데 총 8650억원의 주문이 몰려 8배 넘는 수요가 확인됐다. HD현대중공업은 2021년부터 이번 수요예측까지 매 발행 때마다 흥행을 이어가고 있다.
물론 HD현대중공업의 신용등급은 'A0, 안정적'으로 삼성중공업보다 높기는 하다. 하지만 올해 초 공모채 시장은 업황이나 기업 성과에 따라 'BBB+'급 발행사로도 훈풍이 이어지는 사례가 나타나 공모채를 택하는 게 큰 무리는 아니라는 것이 IB업계의 평이다.
업계 관계자는 "삼성중공업이 여전히 공모채 발행보다는 사모채나 현금 상환 기조를 택하고 있다"며 "등급이 더 높아질 때까지 기다리는 듯 하다"고 말했다.
◇공모채 찍은 계열사 호텔신라·삼성증권뿐 공모채 발행을 피하는 삼성중공업의 행보가 삼성그룹 전반의 조달 전략과 관련이 깊다는 분석도 나온다. 2010년대 초반 한때 3조원을 넘어서던 삼성그룹의 연간 일반 회사채(SB) 발행량은 지난해 6200억원으로 급감했다. 작년 2월 호텔신라가 3000억원, 3월 삼성증권이 3200억원의 공모채를 찍었다.
사실상 호텔신라와 삼성증권 정도가 삼성그룹 계열사 중에선 공모채 정기 이슈어로 평가 받는다. 2022년 삼성물산이 2년 만에 공모채를 발행했는데 만기까지는 아직 시간이 있다. 2021년 공모채 데뷔전을 치른 삼성바이오로직스의 3년물 회사채 만기가 오는 9월로 다가와 올해 발행 후보로 꼽힌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올해도 삼성그룹에선 삼성증권과 호텔신라만 공모채를 찍었다. 삼성증권은 1월 4000억원을 조달했고 호텔신라는 3000억원을 공모 시장에서 확보했다. 보수적인 조달 기조는 당분간 이어질 전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