롯데케미칼의 인수로 최근 일단락된 일진머티리얼즈 매각에서 관심을 끄는 점은 특정 법인이 아닌 허재명 이사회 의장(사진)이 '조 단위' 매각대금의 대부분을 손에 쥔다는 점이다.
허 의장이 보유한 일진머티리얼즈 주식 2457만8512주 등을 인수하기 위해 롯데케미칼이 지급하는 대가는 2조7000억원이다. 여기엔 일진머티리얼즈가 해외 생산법인 관리를 위해 2021년 설립한 아이엠지테크놀로지 인수 자금이 포함돼 있지만 비중은 미미하다. 상당 부분이 허 의장이 보유한 일진머티리얼즈 주식에 대한 대가다.
현행 주식 양도소득세 최대 세율인 25%를 적용해도 허 의장은 1조원이 훌쩍 넘는 현금을 보유하게 된다. 일진머티리얼즈 이사회 의장 외에 별도의 직책을 겸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매각에 맞춰 자연스레 이사회 의장에서 물러나면 허 의장은 '한 개인으로서' 조 단위 자금을 갖는 셈이다.
이에 따라 업계의 관심사 중 하나는 허 의장이 이 막대한 규모의 현금을 어디에 사용할 것인가다. 일진그룹 사정에 밝은 업계 한 관계자는 "허 의장은 일진그룹이 속한 B2B 산업이 아닌 B2C 산업에 진출하는 데 관심이 많았다"며 "과거에도 패션사업에 뛰어든 적이 있다"고 전했다.
실제 허 의장은 2014년 일진머티리얼즈 계열사인 오리진앤코를 통해 캐나다 스파 브랜드인 '조 프레시(Joe Fresh)'를 국내에 들여온 적 있다. 당시 국내외에서 '유니클로'와 '자라' 등 스파 브랜드가 흥행하는 점을 보고 북미에서 4조원 이상의 연간 매출을 달성하던 조 프레시를 국내에 독점 판매하는 사업을 추진한 것이다.
허 의장은 미국을 직접 방문해 조 프레시와 계약을 체결했을 만큼 진지했다. 부친인 허진규 일진그룹 회장이 일찌감치 승계 구도를 정리했기 때문에 형인 허정석 일진홀딩스 대표와 승계를 위한 경쟁에 신경 쓰지 않고 자신의 사업에 온전히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이기도 했다.
일진그룹이 전통적으로 속해 있던 B2B 산업이 아닌 B2C 산업에 진출했기 때문에 허 의장은 나이키와 리바이스, LG패션(현 LF) 등에서 잔뼈가 굵은 남기흥 대표를 영입했다. 배우 고소영 씨를 모델로 내세우고 청담에서 론칭 쇼를 연 뒤 곧바로 명동에 1호점을 내는 등 홍보에도 열을 올렸다.
하지만 결과는 뼈아팠다. 공식 론칭한 지 2년도 채 지나지 않아 허 의장과 조 프레시 측은 사업을 접기로 했다. 조 프레시가 주요 매출처인 미국에서 급격하게 부진한 모습을 보인 까닭이 컸던 것으로 알려진다. 2016년 3월 코엑스몰점 철수로 조 프레시는 국내에서 자취를 감췄다.
그럼에도 허 의장은 여전히 B2C 사업에 관심이 크다는 게 업계 관계자의 전언이다. 단 과거처럼 직접 사업을 운영하기보다는 일진머티리얼즈 매각 자금을 밑천으로 투자회사를 설립해 B2C 기업에 투자할 것이라는 게 한 시각이다. 투자은행 업계 중심으로 허 의장이 싱가포르로 이주해 투자회사를 설립할 것이라는 말이 흘러나오는 것도 이 때문이다.
앞선 관계자는 "허 의장은 진취적이고 터프한 성격"이라며 "이러한 성격 때문에 임직원들 사이에서도 평가가 엇갈렸던 것으로 안다"고 전했다. 이 관계자는 "선대에서 어렵게 얻은 전지동박(elec-foil) 제조 기술을 매각하는 결정을 내리고 자기 사업에 의지를 보이는 밑바탕엔 이러한 기질이 있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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