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력 공룡' 한국전력공사(한전)가 지난해 역대 최대 규모의 손실을 기록했다. 당기순손실이 자그마치 5조2200억원에 달한다. 웬만한 대기업이 이익으로 내기 힘든 숫자를 손실로 냈다. 원인은 의외로 단순하다. 급등한 원자재 가격을 전력 판매 가격에 충분히 반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해답은 '전기 요금 현실화'이지만 정부와 시민사회는 어느 때와 다름없이 뜨뜻미지근한 모양새다. 사용자가 부담해야 할 책임과 비용을 대신 짊어진 한전을 더벨이 살펴본다.
1990년대만 하더라도 한국전력공사(한전)가 국내 주식시장에서 차지하는 위상은 대단했다. 한국거래소 정보데이터시스템은 1996년부터 국내 주식시장 시가총액 순위를 밝히고 있는데, 매해 마지막 거래일 기준으로 1996년부터 1998년까지 코스피 시총 1위 자리는 변함없이 한전 몫이었다. 지금의 삼성전자 위상이 당시엔 한전이었던 셈이다.
한전이 국내외 투자자들로부터 큰 관심을 받은 이유는 매출 구조와 관련 있다. 한전은 예나 지금이나 철저한 내수 기업이다. 해외에서 원자력발전(원전) 사업을 수주해 매출을 올리기도 하지만 국내 기업과 가계 등에 전기를 공급해 거두는 수익이 대부분이다. 이는 곧 국내 전기 수요가 한전의 매출 성장성을 결정짓는 핵심 요소라는 의미다.
국내 전기 수요는 경제성장률(GDP)과 관련 있다. 실제 우리나라 고도 성장기에 마침표를 찍었다고 평가받는 IMF 외환위기 시절을 기점으로 한전이 시총 1위에 오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성장성이 의심되는 조건에 더해 전기요금 현실화 무산, 사실상 없다시피 한 주주환원책 등으로 지난해 시총 순위 20위권 밖으로까지 밀려났다.
◇ 최근 5년 총주주수익률 -45.1%···시총 톱50 가운데 '꼴찌'
지난해 마지막 거래일 기준 한전의 시총 순위는 27위다. 회사 역사상 가장 낮은 순위다. 현재 코스피 내 상장 기업 수가 940여개로 한전이 시총 1위를 고수하던 시기와 비교해 크게 증가한 점을 고려하면 지금의 27위도 높은 위치에 있다고 평가할 수 있다. 하지만 시총의 절대적 규모를 살펴보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한전이 주식 시장에서 지금의 삼성전자와 같은 위상을 갖던 1996년 회사 시총은 15조4402억원이었다. 25년이 흐른 2021년 시총은 14조1874억원으로 8.1%(1조2528억원) 감소했다. 그 사이 3조1992억원이었던 삼성전자 시총은 467조원으로 140배 넘게 증가했다.
주가와 코스피 지수를 비교해도 결과는 동일했다. 1996년 2만4600원이었던 한전 주가는 2021년 2만2100원으로 10.2% 떨어졌다. 반면 코스피 지수는 651.22포인트(p)에서 2977.65p로 357.2% 올랐다. 주식 투자자 입장에선 코스피 지수를 추종하는 금융상품에 투자하는 게 한전 주식을 매매한 것보다 훨씬 큰 이익을 거두는 셈이었다.
물론 한전 주가가 우하향하는 모습만 보인 건 아니다. 2016년 5월엔 사상 처음으로 시총 40조원을 넘어서기도 했다. 하지만 성숙기에 접어든 국내 경제에 더해 전 세계적인 탈원전 흐름과 전기요금 현실화 무산, 원자재 가격 급등으로 투자자들은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대규모 적자로 주주들에게 마땅한 환원책을 펼치기도 어려웠다.
이러한 한전 주식의 위상 변화는 지표로도 확인할 수 있다. 2017년 첫 번째 거래일인 1월2일부터 2021년 마지막 거래일인 12월30일까지 회사의 총주주수익률(TSR)은 마이너스(-) 45.1%다.
최근 5년간 TSR은 한전 주식을 2017년 1월2일부터 2021년 12월30일까지 보유하고 있다고 가정했을 경우 거둔 수익률을 말한다. -45.1%라는 건 절반 가까이 자금을 잃었다는 뜻이다. 이는 지난해 마지막 거래일 기준 코스피 시총 상위 50개 기업 가운데 가장 낮은 수준이다. 이 기간 대규모 구조조정을 한 두산중공업(-17.6%), LG디스플레이(-17.3%)보다 낮다.
◇ 성장 로드맵도, 주주환원책도 안 보인다
올해 들어서도 이러한 추세엔 큰 변화가 없는 상태다. 올해 첫 번째 거래일인 1월3일 14조3478억원이었던 시총은 최근 거래일인 지난 1일 14조7330억원으로 소폭 증가했을 따름이다. 같은 기간 주가도 2만2350원에서 2만2950원으로 동일하게 소폭 올랐다.
지난달 초 발전 비용 절감을 위해 원전 가동률을 90%로 끌어올리겠다는 윤석열 대통령 후보의 당선으로 시총이 15조8886억원까지 오르긴 했으나 보름 정도밖에 유지되지 않았다. 윤 당선인도 현 정부와 동일하게 '전기요금 현실화'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을 내비쳤기 때문이다.
과거처럼 경제성장률이 두 자릿수 대를 보이기 어려운 상황에서 한전의 성장 전략은 전기요금 현실화밖엔 없다. 하지만 전기요금 조정폭을 물가 인상에 예민한 정부가 승인한다는 점에서 전기요금 현실화를 통한 성장 전략을 추진하기도 어렵다. 실제 최근(지난 2월) 발표한 한전 투자 설명자료(IR 자료)에 따르면 회사 경영전략은 철저하게 '온실가스 감축'에 집중돼 있다. 수익 확대를 위한 성장 전략은 없는 셈이다.
많은 기업이 주가 부양을 위해 택하는 배당 확대와 자기주식 매입 및 소각 등을 펼치기도 쉽지 않다. 수익이 안정적으로 일정하게 발생하지 않는 상황에서 일관성이 중요한 배당정책을 세우는 건 적절치 않다. 당초 밝힌 규모와 다르게 배당을 했을 경우 오히려 투자자 신뢰를 잃을 수 있기 때문이다.
과거 효과를 본 자기주식 매입이 하나의 대안으로 꼽히지만 한전은 최근 10년 넘게 자기주식 매입과 소각 등을 하지 않고 있어 시장에선 큰 기대를 하지 않는 분위기다. 사실상 성장 로드맵도, 주주환원책도 딱히 보이지 않는 상황이다.
지난달 2일 신한금융투자는 '요금 정상화라는 그림의 떡'이라는 보고서에서 "연료비 조정단가가 에너지원 가격 상승을 반영해 상승하게 되면 요금 정상화에 대한 기대감이 주가 상승을 견인할 수 있다"며 "그러나 물가 상승 구간과 대선 이후 정권 초기라는 점이 겹치기 때문에 현실적으로 어렵다는 판단"이라고 분석했다. 예상대로 지난달 29일 정부는 연료비 조정단가를 1kWh당 3원 인상해달라는 한전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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