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력 공룡' 한국전력공사(한전)가 지난해 역대 최대 규모의 손실을 기록했다. 당기순손실이 자그마치 5조2200억원에 달한다. 웬만한 대기업이 이익으로 내기 힘든 숫자를 손실로 냈다. 원인은 의외로 단순하다. 급등한 원자재 가격을 전력 판매 가격에 충분히 반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해답은 '전기 요금 현실화'이지만 정부와 시민사회는 어느 때와 다름없이 뜨뜻미지근한 모양새다. 사용자가 부담해야 할 책임과 비용을 대신 짊어진 한전을 더벨이 살펴본다.
대규모 적자를 낸 기업에 필요한 것 중 하나는 최대주주의 지원이다. 특히 운영자금과 필수 설비투자금을 부채로 조달하는 기업 입장에선 부채비율(부채÷자본)을 낮출 수 있는 유상증자와 같은 최대주주 출자는 더할 나위 없다.
이에 대해 유통 주식수 증가로 반감을 표하는 투자자들도 있지만, 적자 기업에 최대주주라는 든든한 버팀목이 있다는 점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최대주주의 출자는 시장에 긍정적인 신호일 수 있다.
그럼 한국전력공사(한전)의 최대주주인 정부와 KDB산업은행(산은)은 어떨까. 결론부터 말하면 공시된 사업보고서 기준으로 최근 20년간 정부와 산은이 한전에 출자한 적은 단 한 차례도 없었다. 필수 설비투자금이 부족한 때에도, 부채비율이 급등한 때에도 정부와 산은은 '뒷짐' 지고 있었을 따름이다. 외려 배당을 가져가면서 한전 재무구조는 부실해졌다.
◇ CAPEX 자금도 부족한 때, 배당으로 수천억 가져간 최대주주
1일 금융감독원 전자공시시스템에 따르면 지난해 말 기준 한전의 1대주주는 산은이다. 32.9%의 지분을 보유하고 있다. 2대주주는 정부로 보유 지분은 18.2%다. 하지만 산은이 정부가 100% 출자한 국책은행인 점을 고려하면 한전의 최대주주는 사실상 정부나 다름없다. 총 보유 지분 51.1%다.
과거 1대주주가 정부였던 한전의 주주구성이 지금 같은 모습으로 자리 잡은 해는 2004년이다. 1997년 IMF 외환위기 이후 정부는 한전 민영화를 추진하기로 결정했고 이 과정에서 신뢰 높은 금융기관이 악화된 한전의 재무구조를 지켜주는 게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몸값을 높이기 위한 결정이었다.
정부는 한전의 백기사로 산은을 낙점했고 정부와 산은은 '한전 지분'과 '한전에 대한 지급보증'을 교환했다. 그러나 한전 민영화는 전기요금 급등을 우려한 정치권과 시민사회의 반발로 결국 무산됐고 정부와 산은이 한전을 공동 소유하는 형태로 굳어졌다.
이러한 변화 아닌 변화에도 한전에 대한 정부와 산은 기조는 변함이 없었다. 바로 '출자(지원)는 하지 않더라도 배당은 가져간다'이다. 1998년부터 2021년까지 지급일 기준으로 24년간 배당으로 현금을 가져간 해는 총 17번이다. 이 기간 정부가 한전에 출자한 사례는 2003년과 2011년 단 두 차례다. 이마저도 모두 현물출자로 현금 지원은 아니었다. 규모도 크지 않았다는 점에서 사실상 출자는 없었던 셈이다.
한전에 필수 설비투자금(CAPEX)이 부족한 때도 정부는 배당으로 현금을 가져갔다. 이를테면 2016년부터 2021년까지 회사 잉여현금흐름은 2016년을 제외하면 모두 마이너스(-)였다. 한 해 사업으로 기업 존속을 위해 필요한 CAPEX 자금도 벌지 못한 것이다. 그럼에도 정부는 2019년과 2020년을 제외한 해에 모두 배당으로 수천억원 이상의 현금을 가져갔다. 6000억원 가량의 현금을 가져간 해(2017년)도 있었다. 지원이 절실한 때 오히려 재무구조를 더 부실하게 만드는 결정을 최대주주가 내린 것이다.
배당 여부와 규모를 결정하는 한전 이사회는 7명의 사내이사(상임감사 포함)와 8명의 사외이사로 구성돼 있다. 사내이사가 주주총회 의결을 거쳐 임명되고, 사외이사도 정부 인사로 구성된 공공기관운영위원회의 의결을 거쳐 기획재정부 장관이 임명한다는 점에서 한전 이사회는 정부 영향력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 한전법에 따라 '2.8조 자본금 수혈' 가능하지만···
한전은 '한국전력공사법'(한전법)에 의해 조직되고 운영된다. 한전법 제4조에 따르면 한전 자본금은 정부 지분이 51% 이상을 유지한다는 조건 아래서 최대 6조원까지 늘릴 수 있다. 지난해 말 기준 한전 자본금은 3조2098억원이다. 정부와 산은이 한전에 2조7902억원을 출자할 공간이 있는 것이다.
한전 주식 액면가가 5000원이고 현재 주가가 2만원 초반대이기 때문에 유증이 이뤄질 경우 자본금뿐 아니라 주식발행초과금(자본잉여금)도 크게 증가할 것으로 추산된다. 이럴 경우 자본총계가 늘어나면서 지난해 말 223%로 급등한 부채비율은 대폭 개선될 가능성이 있다. 부채비율 223%는 최근 10년래 최고치다.
그럼에도 한전에 대한 출자는 현재 공론화조차 되지 못하는 실정이다. 업계 안팎에선 최근 정부가 연료비 조정단가를 1kWh당 3원 인상해야 한다는 한전 요구마저 수용하지 않는 상황에서 전기요금 인상과 달리 정부에 실질적인 재무적 부담을 안겨 주는 출자는 불가능한 시나리오라는 평가다.
과거를 살펴봐도 정부와 산은이 한전에 유증을 통해 재무구조를 개선시킨 사례는 전무하다시피 하다. 2001년 정부가 발전 시장을 개방하면서 한전 발전 부문이 자회사로 분리된 때를 기점으로 한전 자본금은 지금까지 3조2000억원 수준을 벗어난 적이 없다. 사실상 정부 출자는 없었던 셈이다.
한국기업평가 측은 "최근 (한전의) 유증 사례가 없고 재무안정성의 유의미한 회복을 위해서는 수조원의 대규모 자금이 필요한 점을 고려하면, 근거법상 유증 제약이 없다 하더라도 한전이 유증을 택할 가능성은 높지 않다고 본다"며 "요금 현실화 압박이 우선할 것으로 예상된다"고 분석했다.
< 저작권자 ⓒ 자본시장 미디어 'thebell', 무단 전재, 재배포 및 AI학습 이용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