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채권시장은 새해가 되면 큰손들의 투자 열기로 뜨거워진다. 그래서 많은 한국물(Korean Paper) 발행사도 해가 바뀌자마자 재빨리 시장을 찾아 거액의 수요를 확보한다.
하지만 올해는 분위기가 사뭇 다르다. 민간기업 중에선 차환을 위해 조달이 시급한 곳을 제외하면 신중하게 시장 상황을 살피려 한다.
SK하이닉스와 포스코가 대표적이다. 최근 2년 동안 1월만 되면 글로벌본드 시장에 등판했지만 올해는 내년 발행 일정을 확보하기 위한 움직임이 없다. 당분간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당선인의 정책 방향성을 살피려 한다는 게 IB(투자은행)업계의 관측이다.
◇예상보다 '한산한' 1월 윈도 26일 IB업계에 따르면 SK하이닉스와 포스코는 내년 1월 발행을 위한 윈도(Window)를 받지 않았다. 외화채를 발행하려는 기업은 기획재정부로부터 프라이싱 일정을 받아야 한다. 내년 초 발행을 원하는 기업 대부분은 이미 이달 중 관련 논의를 마쳤지만 SK하이닉스와 포스코는 잠잠했다.
IB업계가 두 회사를 주목하는 이유는 분명하다. 두 기업이 최근 수년 동안 1월만 되면 글로벌 본드를 발행했기 때문이다. SK하이닉스의 글로벌 본드 북빌딩 일정을 살펴보면 2021년부터 올해 초까지 발행을 건너뛴 2022년을 제외하곤 모두 1월 초 투자 수요를 확인했다. 1월 중순까지 발행을 완료하는 일정이었다. 포스코도 마찬가지다. 2023년과 올해 모두 1월 프라이싱에 나서 발행을 마쳤다.
글로벌 IB도 연말 들어 정기 이슈어인 두 기업을 찾아 발행 의사를 확인했다. 하지만 모두 한국물 발행에 보수적인 시각을 내비쳤다는 후문이다. 그래서인지 지금까지 내년 1월 발행을 확정한 곳은 한국수출입은행이나 한국산업은행 국책은행 정도만 눈에 띈다. 민간기업 중에선 차환이 급한 대한항공이나 현대캐피탈 등이 발행 의사결정을 내렸다.
발행을 미룬 민간기업은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이 취임한 뒤 채권시장을 살피려는 듯 하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트럼프 당선인이 내년 1월 20일 취임하는 만큼 이 때까진지 섣불리 조달에 나서기 어렵다는 기조다. 트럼프 당선인은 선거 유세 기간 동안 관세 부과와 감세를 강력하게 주장했다. 통화정책에 대해 강력하게 개입하겠다는 의사도 밝혔다.
하지만 글로벌 IB는 오히려 이럴 때일수록 선제적인 조달을 강조한다. 트럼프 당선인 취임을 앞두고 유동성 흐름은 나쁘지 않은데 과도한 우려가 퍼지고 있다는 분석이다. 오히려 무역전쟁 같은 보호무역주의가 본격적으로 확산되기 전 새해에 빠르게 수요를 파악하는 게 낫다고 조언하는 목소리도 있다.
◇부채 상환 기조에 조달 피하기도 SK하이닉스의 경우 호실적이 뒷받침된 덕에 한국물 발행을 미룬다는 평가도 있다. SK하이닉스는 최근 엔비디아에 공급하는 HBM(고대역폭메모리) 실적 호황세에 힘입어 높은 수익성을 나타내고 있다. 올해 3분기까지 연결 기준 매출은 46조4259억원, 영업이익은 15조3845억원으로 영업이익률이 33%에 달한다. 지난해 같은 기간 반도체 공급 과잉으로 8조원 넘는 영업적자를 기록했던 것을 감안하면 1년 만에 상황이 완전히 달라졌다.
버는 돈이 많으니 부채도 상환하고 있다. 지난해 말 기준 순차입금은 약 24조원이었는데 올해 3분기 말 기준으로 14조원까지 줄었다. SK하이닉스는 올해 1월 글로벌본드를 발행해 15억달러(약 2조원)를 확보한 경험이 있다. 한 번 외화채를 찍을 때마다 우리 돈으로 조 단위를 빌리는데 지금은 빚을 갚고 있으니 조달 필요성이 크지 않다는 분석이다.
포스코는 올해 초 새로운 리더십을 맞이하면서 지주 차원에서 보수적인 채권 발행 기조를 드러냈다. 원화 공모채는 물론 외화채도 예외는 없었다. 지난해 1월 20억달러 어치 글로벌본드를 발행지만 올해 1월에는 5억달러를 발행하는데 그쳤다. 내년 초에는 이마저도 어렵다 뜻이다.
IB업계 관계자는 "SK하이닉스와 포스코를 비롯한 다수의 민간기업이 내년 초 발행에 선뜻 나서기 조심스럽다는 의사를 보였다"며 "한국물 발행사가 1분기 시장 흐름을 지켜보려 해 내년에는 2분기가 시작하는 4월이 평년의 1월 같아질 수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