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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기사의 법칙

적대적 M&A로 '주인 바뀐' 한화손보 운명

[경영권 인수]②김승연 회장, 친누이 '백기사' 전면 등장…인수 후 '고난의 행군'

김현정 기자  2024-11-05 10:45:39

편집자주

백기사는 적대적 인수합병(M&A) 세력으로부터 공격을 받는 기업 측에 선 '우호적 지분 인수자'를 의미한다. 혈연이나 가문 간 끈끈한 유대 관계를 바탕으로 한 아군의 성격을 띤 백기사도 있고 치밀한 전략적 셈법으로 무장한 백기사도 있다. 결국은 경영권 인수를 노린 케이스도 존재한다. 당사자도 아닌 자가 대규모 비용을 감내하며 경영권 분쟁에 뛰어든 데는 나름의 이유가 있다. THE CFO는 주요 경영권 분쟁 사례 속에서 백기사의 유형들을 살펴본다.
일찌감치 한화손해보험에 흡수합병된 제일화재는 당초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의 친누나인 김영혜씨에게 상속된 회사였다. 외형확장을 목표로 한 메리츠화재의 갑작스런 적대적 M&A 시도로 주인이 누나에서 동생으로 뒤바뀐 사례다.

숨가쁜 M&A 판에서 한화가와 한진가 우애의 온도차가 조명되기도 했다. 제일화재가 메리츠화재로부터 공격을 받자 한화그룹은 ‘일사분란’하게 움직였다.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이 즉각 백기사를 자처하며 제일화재 수성에 나섰다.

반면 한진그룹은 그러지 못했다. 되레 ‘형제분란’만 부각됐다. 조남호 한진중공업그룹 회장이 M&A 준비 과정에서 조정호 메리츠금융그룹 회장을 도왔을 뿐 막상 판이 커지자 선을 그었다. 맏형 고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은 부정적 견해를 견지했다.

결국 공격 당하는 쪽의 절박함과 수성 의지, 남매의 빠른 판단이 합쳐져 메리츠화재의 적대적 M&A 시도를 막을 수 있던 것으로 평가됐다.

◇계열분리됐던 제일화재, 갑작스레 메리츠화재 적대적 M&A 공격받다

당초 한화 계열사였던 제일화재는 1996년 한화그룹으로 독립 수순을 밟았다. 한화그룹 창업주인 고 김종희 회장이 작고하면서 장녀인 김영혜씨에게 제일화재를 상속했고 김영혜씨는 바로 제일화재 지분을 들고 계열분리하면서 한화그룹으로부터 떨어져 나왔다.

김영혜씨는 2001년부터 제일화재 이사회 의장직을 수행하며 경영에 관여하기도 했지만 제일화재의 주요 축은 전문경영인 체제였다. 제일화재는 업계 6위권을 유지하며 나름의 영향력을 높이고 있었다.

메리츠화재로부터 갑작스런 적대적 M&A 공격을 받은 건 2008년 일이었다. 당시 업계 5위였던 메리츠화재는 외형확장이라는 목표를 세우고 제일화재를 노렸다. 제일화재 인수를 가정했을 때 1위인 삼성화재는 제쳐두고 현대·동부·LIG 등 손보업계 2위권 회사들과 엇비슷한 외형 및 경쟁력을 가질 수 있었다. 그 당시 대한화재를 인수해 출범한 롯데손해보험이 바짝 추격해온 점이 메리츠화재의 인오가닉 성장 의지에 불을 당겼다.

메리츠화재는 2007년 7월부터 물밑에서 제일화재 지분을 매수하기 시작했고 11.47%를 확보한 이듬해 4월 적대적 M&A를 선언했다. 당시 제일화재는 최대주주 지분이 20.68%에 불과했던 만큼 M&A 공격에 노출될 위험이 높은 회사였다. 그러나 제일화재의 뒤에는 한화가 있었다. ‘인수 시도 시 한화 리스크’를 과소평가한 게 메리츠화재 M&A의 주요 패착이 됐다.


◇한화그룹의 '제일화재 구하기', 남동생의 '누이 회사 지키기'

메리츠화재가 적대적 M&A를 발표한지 4일이 채 지나지도 않아서 한화그룹은 제일화재의 백기사를 선언했다. 제일화재 경영권을 인수해 한화손해보험과 합병하겠다며 메리츠화재 측을 압박했다. 그리고 바로 다음날부터 제일화재 지분 매입을 시작했다.

한화건설을 중심으로 한화L&C, 한화갤러리아, 한화리조트, 한화테크엠 등 비상장 계열사 5곳이 동원됐다. 김승연 회장이 누나 회사의 경영권 방어를 위해 총력전을 펼친 셈이었다. 결국 한화그룹 측이 제일화재 지분 47.18%를 확보하기에 이르렀고 인수전이 시작된 지 두 달여 만에 메리츠화재는 인수 포기를 공식 선언했다.

업계는 당시 상황을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속담에 비유했다. 김종희 창업주는 타개할 당시 김승연 회장에게 '누나를 잘 챙겨주라'는 유언을 남긴 것으로 전해진다. 실제로 김승연 회장은 제일화재가 어려움에 처했을 때마다 든든한 후원자가 돼줬다. 외환위기 때에는 제일화재에 자금을 유통해주는 한편 2002년 한화그룹이 신동아화재(현 한화손보)를 인수한 이후에도 한화그룹과 제일화재 간 기존 보험계약은 그대로 유지했다.

메리츠화재 측은 인수가 실패로 돌아간 뒤 “인수 이전 여러가지 시나리오를 검토했으나 한화가 이렇게 빨리 직접적으로 나설 가능성은 낮다고 봤다”고 말한 것으로 전해진다. 한화가 대기업인 만큼 제일화재 인수전에 뛰어들기에는 여러 제약이 있을 것으로 판단했지만 그를 뛰어넘었다는 얘기였다.

반면 한진그룹의 형제간 우애는 썩 탄탄한 모습을 보이지 못해 당시 업계는 한화그룹과 이를 비교했다. 고 조중훈 한진 회장의 4남인 조정호 메리츠금융그룹 회장은 제일화재 M&A를 준비하면서 둘째 형인 조남호 한진중공업그룹 회장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이에 한진중공업은 한국종합기술(2.22%)과 한일레저(0.93%)를 통해 제일화재 지분을 사전에 일부 매입했었다.

하지만 이후 한화그룹과의 전면전으로 판이 커지자 한진중공업 측은 "그룹 간 대결로 보는 시각은 맞지 않다"고 선을 그으며 추가 지분 매입은 하지 않았다. 첫째 형인 고 조양호 한진 회장의 경우 아예 제일화재 인수전에 참여할 뜻이 없음을 분명히 했다. 조양호 회장은 “내 개인 철학은 적대적 M&A를 하지 않는 것”이라며 부정적 견해를 밝히기도 했다.

사실 한진가 2세 형제들은 조중훈 회장이 작고한 뒤 유산 등을 둘러싸고 크고 작은 법적분쟁을 벌이는 등 사이가 별로 좋지 않았다. 제일화재 M&A 판을 한진그룹과 한화그룹 간 ‘가문의 대결’로 연결 짓는 시선이 많았는데 한화그룹의 최종 승리는 ‘우애’ 덕분이란 얘기도 함께 돌았다.


◇인수 후 고난의 시기...김영혜씨 '한익스프레스', 한화발(發) 매출 '눈길'

이 가운데 한화그룹이 제일화재 백기사로 나선 것은 꼭 ‘남매간의 정’ 때문은 아니었다. 당시 한화그룹도 전략상 제일화재 합병이 필요했다.

화약 제조업체로 출발한 한화그룹은 2000년대 초반 그룹의 새 미래 성장 엔진을 금융과 레저, 유통 부문으로 선정했다. 2002년 대한생명(현 한화생명)을 인수하며 그 첫 단추를 끼웠다. 한화손보는 한화그룹이 대한생명을 인수하면서 그룹에 함께 편입된 ‘신동아화재’가 이름을 바꾼 곳이었다. 업계 7위사로 상위권에 올라가려면 역시 M&A가 필요했다.

특히 제일화재와 한화손보는 강점이 각기 달랐기에 둘이 합치면 시너지도 클 것으로 예상됐다. 한화손보는 장기손해보험 중심의 오프라인 조직 영업에 비교우위가 있었으며 업계서도 영업력이 뛰어난 것으로 유명했다. 제일화재는 자동차보험 중심의 온라인 영업에 강점이 있었다.

제일화재가 과거 한화그룹의 계열사로서 한화의 기업문화와 친숙한 관계인 것도 한화손보와 화학적 결합을 높일 수 있는 요인으로 꼽혔다. 한화는 인수전을 진행하면서 중장기적으로 제일화재 인수를 통해 손보업계 2위권에 진입한다는 복안을 밝혔다.

다만 막상 인수 이후 큰 점프를 하진 못했다. 합병 이후 주력 상품인 장기손해보험이 힘을 받지 못한데다 손해율도 개선되지 못하면서 점유율 합이 되레 소폭 줄어들었다. 인수 이후 한화손보의 10년은 실제 중위권을 지키기 위한 고난의 행군이었다.

그럼에도 한화손보는 꾸준히 기초체력 다지기를 이어갔다. 우량물권 위주로 자동차보험을 과감히 접어 나갔고 장기보험 중심의 영업 정책을 펼쳤다. 고가치 보상정 상품을 중심으로 영업력을 높이며 일반보험도 강화했다. 근래 2022년 들어선 ‘여성 특화 보험사’로 시장을 공략 중이다. 새 국제회계기준(IFRS17) 적용 이후 자본잠식 우려를 즉시 해소하면서 우수한 자본적정성을 바탕으로 내실다지기를 진행하고 있기도 하다.

한편 김영혜씨는 제일화재 지분을 한화그룹에 매각한 지 3개월 만에 운송업체인 한익스프레스를 인수하며 새 사업기반을 꾸렸다. 탄탄한 실적을 내는 알짜회사지만 역시 한화그룹과의 거래관계가 매출의 절반가량을 차지한다. '일감 몰아주기'가 문제가 돼 공정거래위원회가 과징금을 부과했고 이에 불복해 소송까지 진행했지만 법원은 지난해 9월 공정위 손을 들어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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