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D현대오일뱅크의 자회사인 HD현대케미칼은 올레핀 설비인 중질유분해설비(HPC)를 짓기 위해 3조원을 넘게 들였다. 투자가 가장 활발했던 2020~2021년에는 자본적지출(CAPEX)로 매년 1조원을 웃도는 금액이 집행됐다. 2014년 설립된 뒤 한 해 CAPEX로 1조원이 넘는 자금을 투입한 것은 이 시기뿐이다.
HPC 투자는 2022년 마무리됐지만 약화된 HD현대케미칼의 재무체력은 회복되지 않았다. 오히려 재무안정성이 더 악화된 상태다. 업계와 신용평가사에서는 HD현대케미칼이 투자 후유증을 극복하기까지 시일이 소요될 것으로 보고 있다.
◇HPC 설립 이후 매출은 늘었지만… HPC가 HD현대케미칼의 매출 증대에 기여한 것은 사실이다. HD현대케미칼이 2014년 설립된 이후 2021년까지는 최대 매출이 4조1526억원으로 나타났다. HPC가 준공된 2022년부터는 매출이 늘어난 점이 뚜렷하게 확인된다. HD현대케미칼의 2022년 매출은 8조1112억원, 2023년 5조7700억원이었다. 이중 HPC로 발생한 매출은 2022년 기준 1조3596억원, 2023년 6443억원으로 추산된다.
HPC를 통해 HD현대케미칼이 원하던 수준의 수익은 확보할 수 없었다. 당초 모회사인 HD현대오일뱅크는 HPC로 연간 5500억원 수준의 영업이익을 추가할 수 있을 것으로 관측했다. HPC 가동을 시작한 시기 자체가 좋지 않았다. HPC가 준공된 2022년은 석유화학 산업의 업황 악화가 시작된 시기다. 충분한 수익을 내기 어려운 상황이 됐다.
그래도 2022년까지는 등경유와 벤젠·톨루엔·자일렌(BTX) 등 아로마틱 석유화학 제품, 윤활유 등 사업이 선방하며 매출과 영업이익이 모두 크게 증가했다. 영업이익률도 4%로 직전해(2021년)와 비슷한 수준을 유지했다.
상황이 급격히 악화된 것은 이듬해인 2023년이다. 매출은 5조7700억원으로 전년 대비 29% 줄었다. 회복될 기미가 없는 석유화학 시장상황을 고려해 설비 가동률을 낮춘 결과다. HPC 모노머 설비는 2022년 83%에서 2023년 43%로, 폴리머 설비는 58%에서 38%로 가동률을 조정한 것으로 나타났다. 영업이익 감소폭은 99%에 달했다. 2022년 3328억원이었던 영업이익이 2023년에는 단 16억원에 불과했다.
◇CAPEX 줄였지만 차입부담 커졌다 HPC를 완공한 이후 회사의 수익성이 악화되며 HD현대케미칼은 재무안정성을 회복하지 못했다. 보유한 현금과 사업에서 발생하는 수익으로 총 3조원에 달하는 투자비를 감당할 수 없었다. 모회사인 HD현대오일뱅크와 롯데케미칼로부터 2019년 7400억원, 2021년 3000억원을 지원받았고, 차입도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결과적으로 HPC 투자가 시작된 2019년 9026억원이었던 HD현대케미칼의 총차입금은 투자가 완료된 2022년 3조6269억원으로 늘어났다. 이에 따라 부채비율은 88.5%에서 203.9%로, 차입금의존도는 32.2%에서 57.7%로 치솟았다.
투자가 끝난 뒤 CAPEX 소요가 눈에 띄게 줄었음에도 현금 순유출 기조가 유지됐다. 투자기간(2019~2022년) 연 평균 1조원의 CAPEX가 집행됐고, 2023년 CAPEX는 2542억원으로 나타났다. 하지만 2023년에는 HD현대케미칼의 실적 악화로 총영업활동현금흐름(OCF) 역시 208억원으로 줄었다. 2023년 역시 잉여현금흐름(FCF)이 마이너스(-) 980억원으로 음수를 기록했다.
올 1분기까지 현금 순유출이 이어지며 차입금이 증가와 부채비율·차입금의존도 등 레버리지 지표도 상승세가 지속되고 있다. 올 1분기 HD현대케미칼의 총차입금은 3조8127억원으로 부채비율과 차입금의존도는 각각 228.2%, 61.4%다.
상황이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자 한국기업평가와 나이스신용평가는 지난달 HD현대케미칼의 신용등급(A) 전망을 '안정적'에서 부정적'으로 조정했다. 한국기업평가는 "상저하고의 흐름으로 완만한 업황 개선이 가능하겠지만, 누적된 초과공급으로 인해 개선폭은 제한적일 것"이라며 "비우호적인 업황으로 인해 현금창출력 제고를 통한 재무안정성 개선 시점이 지연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고 전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