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조기업에 재고자산은 '딜레마'다. 다량의 재고는 현금을 묶기 때문에 고민스럽고, 소량의 재고는 미래 대응 능력이 떨어진다는 점에서 또 걱정스럽다. 이 딜레마는 최근 더 심해지고 있다. 공급망 불안정에 따른 원재료 확보의 필요성과 경기침체에 따른 제품 수요의 불확실성이 샌드위치 형태로 기업을 압박하고 있기 때문이다. 더벨은 기업들의 재고자산이 재무에 미치는 영향 등에 대해 살펴본다.
2023년은 엘앤에프 사업 역사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해였다. 지난 6월과 8월 합작회사(JV)를 설립하는 방식으로 음극재와 전구체 사업에 진출했다. 10월에는 주주총회에서 코스피 이전 상장 안건을 결의했고 최근에는 연간 매출 4조원 돌파를 눈앞에 뒀다.
그 사이 곳간에도 여러 변화가 생겼다. 가장 눈여겨볼 점은 '재고'다. 엘앤에프의 재고자산은 최근 1조4400억원까지 쌓였다. 특히나 원재료가 차지하는 금액(6300억원)이 전년 대비 꽤 증가했다. 리튬 가격 하락 리스크를 안고 수주 계약에 대비하는 모습이다.
◇지난해 이후 증가 추세…'원재료'가 원인
엘앤에프의 올해 3분기 말 연결 기준 재고자산은 1조4440억원으로, 전년 같은 분기(9120억원)에 비해 증가분이 5000억원에 달했다. 2020년 말 1000억원 수준이던 재고자산은 작년 말 들어 1조원을 돌파하더니 현재까지 계속 증가 추세를 나타내고 있다.
자세하게 들여다보면 회사의 재고자산 가운데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한 건 '원재료'였다. 원재료가 6300억원으로 비중(44%)이 가장 컸다. 전년 같은 기간과 견줘 금액은 2800억원, 비중은 7% 더 높아졌다. 나머지는 △제품(32%) △반제품(19%)으로 구성됐다.
악성재고 문제는 주로 제품이 팔리지 않을 때 생긴다. 엘앤에프는 예년에도 재고자산에서 제품이 차지하는 비중이 30%대를 유지했다. 결과적으로 제품 재고는 적정선에서 관리되고 있고 오히려 향후 생산을 위해 미리 원재료를 쌓아둔 것으로 볼 수 있다.
수시로 체결 중인 수주에 대응하기 위한 절차로 풀이된다. 엘앤에프는 올해 2월 테슬라와 3조8000억원 규모의 양극재 공급 계약을 체결했다고 공시했다. 이밖에 업계는 연내 유럽 배터리 업체와 20조원 수준의 양극재 공급 계약이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
특히 엘앤에프는 지난 6월 차세대 음극재 사업 진출을 위해 미쯔비시케미컬과 합작법인(JV)을 세우기로 했고, 8월에는 전구체 사업을 위해 LS그룹과 손을 잡는 계획을 밝혔다. 소재 생산능력(CAPA) 확대에 따라 추가적인 수주 가능성까지 점칠 수 있다.
◇광물 가격 반등 시점이 가장 중요
원재료 가격이 낮아진 상황을 활용했다는 해석도 있다. 가령 주요 원재료인 리튬 가격은 2022년 3분기 톤(t)당 7만달러에서 현재 2만달러 수준으로 하락한 상황이다.
메탈 가격 하락세는 내년 상반기까지 계속될 전망이다. 엘앤에프가 테슬라와 체결한 하이니켈 양극재 공급이 이뤄지는 시점이 내년 1월이다. 차라리 저렴한 가격에 원재료를 들이면 수주 대응 능력을 키우는 것과 함께 비용 절감까지 효과를 누릴 수 있다.
문제는 리스크다. 양극재 판가는 광물 가격과 연동된다. 이러한 하락세는 엘앤에프의 재무에도 악영향을 주게 된다. 엘앤에프는 올해 3분기에 이미 250억원의 재고자산 평가손실충당금을 반영했다. 손실로 인식한 규모가 1년 만에 210% 가까이 뛰었다.
4분기에도 상당한 평가손실충당금 반영이 예상되고 있다. 여기에 재고자산회전율은 1년 새 5.4회에서 3.9회로 하락했다. 재고가 팔려 매출로 전환되는 기간이 길어졌다는 뜻이다. 결과적으로 재무·사업적 리스크를 안고 재고자산을 늘리고 있는 셈이다.
이차전지 소재 업계 관계자는 "리튬 가격의 반등 시점이 가장 중요하다"며 "증가하는 출하량에 대비하는 모양새인데 신규 수주로 연결될지, 상황을 잘 활용한 한 수가 될지는 역시 리튬 가격 추이를 더 지켜봐야 하는 상황"이라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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