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전자의 작년 말 별도 기준 순차입금은 마이너스(-) 9조1149억원이다. 차입금을 모두 갚고도 9조원이 넘는 현금이 있다는 의미다. 연결 기준으로 시야를 넓히면 이 금액은 무려 102조원으로 늘어난다.
워낙 현금이 많으니 조달의 필요성도 떨어진다. 삼성전자는 국내의 경우 IMF 외환위기 사태가 있었던 1997년 30년물 발행과 2001년 1조원의 회사채 발행 외에는 직접금융식의 조달 이력이 없다. 해외 자본시장에서도 2012년 삼성전자 미국 현지법인(SEA·Samsung Electronics America Inc.)의 달러채 발행 외에는 발행 역사가 없다. 다른 발행사들에 비해서 증권사 등과 협력할 이유가 적었다는 의미다.
이런 배경 탓에 역대 삼성전자 최고재무관리자(CFO)별 금융기관과의 관계도는 삼성전자에서 찾기 힘들다. 전임 CFO였던 최윤호 삼성SDI 사장에 이어 현 CFO인 박학규 경영지원실장 체제에서도 직접 조달을 통한 금융기관과의 협업 가능성은 적어 보인다.
다만 시야를 CFO 개인이 아닌 삼성전자라는 '기업'으로 넓히면 금융기관과의 관계도가 보다 선명해진다. 증권사가 아닌 은행권과의 관계다. 직접 조달 사례가 드문 삼성전자도 은행권에서는 돈을 빌린다.
물론 작년 말 기준 별도 차입금의존도는 약 4%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별도 총차입금의 규모는 9조8046억원으로 10조원에 육박한다. 금융기관과의 거래가 필요없어보이는 삼성전자도 금융기관과의 긴밀한 관계를 유지해오고 있다는 의미다.
전통적으로 조달 이슈가 크지 않았던 탓에 삼성전자는 최고재무관리자(CFO) 별 금융 파트너가 갈리지는 않는다. 다만 역사적으로 삼성전자와 가장 밀접한 금융 파트너는 우리은행이었다. 이는 박학규 실장이 CFO로 부임한 현재도 마찬가지다.
삼성전자는 1960년대부터 주거래은행을 우리은행의 전신인 한일은행으로 정했다. 금융감독원 발표에 따르면 작년에도 삼성전자를 포함해 삼성그룹의 주채무은행은 우리은행이었다.
삼성전자와 우리은행의 끈끈한 관계는 삼성전자 사업보고서에서도 드러난다. 삼성전자는 회사채를 제외한 차입금의 대부분이 단기차입금이다. 작년 말 기준 9조2043억원의 잔액이 있다. 삼성전자는 차입처로 '우리은행 등'을 기재했다. 주요 차입처가 우리은행인 셈이다. 기타 차입처들은 공개하지 않았다. 삼성전자 측도 "사업보고서 기재 내용 외의 내용은 밝히기 어렵다"고 말했다.
삼성전자가 우리은행을 비롯한 금융권에서 차입금을 조달하는 이유는 영업활동 과정에서 필요한 유동성을 마련하기 위함이다. 힌트는 차입금의 성격에 있다. 9조2043억원의 차입금은 모두 매출채권을 담보로 제공한 담보부차입금이다.
매출채권담보대출(매담대)는 쉽게 말해 삼성전자가 외상매출채권을 담보로 은행에서 납품대금을 받고, 추후 구매기업이 이 금액을 상환하는 결제 시스템이다. 매담대를 통해 삼성전자는 빠르게 유동성을 확보할 수 있고, 금융기관은 이자비용을 통해 수익을 얻을 수 있다.
다만 삼성전자는 매담대가 없어도 충분한 현금이 도는 기업이다. 이에 환 헤지(Hedge) 등을 위해 매담대를 활용하는 것으로 보인다. 해외에서 유입되는 매출채권의 경우 항상 환위험에 노출돼있다. 매담대를 활용해 이를 빠르게 유동화할 경우 환위험을 피할 수 있다.
매담대 통합한도액은 매년 늘어나고 있다. 삼성전자는 우리은행을 필두로 지난 10년 간 5~7개의 금융기관에서 매담대를 받아왔다. 작년 말 기준으로는 우리은행 외 5개 은행에서 무역금융과 상업어음할인, 외상매담대 등의 약정을 맺은 상태다. 통합한도액은 10조3048억원이다.
매담대 이용의 대가는 이자비용이다. 삼성전자는 작년 말 별도 기준 이자비용으로 1500억원을 기록했다. 2010년대 중반 3000억원대 이자비용을 기록하다가 2020년부터 이자비용이 1000억원대 중후반으로 줄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