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K하이닉스가 역대급 투자를 단행한다. 삼성전자와 마이크론이 고삐를 쥔 상황에서 인공지능(AI) 메모리 주도권을 놓치지 않겠다는 의도다.
궁극적으로는 위기에 처한 SK그룹을 살리기 위한 차원이다. SK그룹이 미래성장 전략의 무게 중심을 배터리·바이오·반도체(BBC)에서 AI·배터리·반도체(ABC)로 옮긴 만큼 SK하이닉스의 역할은 더욱 커질 전망이다.
◇메모리 초호황기 넘어선 자본적지출, 경쟁사 촉각
1일 SK그룹 내 최고 의사결정기구인 SK수펙스추구협의회(수펙스)는 반도체위원회를 신설하고 곽노정 SK하이닉스 사장을 위원장으로 보임했다. 해당 위원회에는 SK스퀘어, SKC, SK머티리얼즈, SK실트론 등도 참여한다.
수펙스 산하에 특정 업종의 위원회가 생긴 첫 사례다. 그룹 차원에서 반도체 총력전을 펼치겠다는 의지로 읽힌다.
이번 결정은 지난달 28~29일 SK그룹 주요 계열사 최고경영자(CEO) 20여명 등이 참석한 '경영전략회의'에서 이뤄졌다. 이 자리에서 SK하이닉스가 2024년부터 2028년까지 총 103조원을 투자하는 계획도 정해졌다.
5년 동안 매년 20조원 이상 쓰는 셈이다. 이는 전례 없는 수치다. 데이터센터 설립 러시로 초호황을 누린 2017년(10조3360억원)과 2018년(17조380억원)을 넘어선다. 코로나19 국면에서 정보기술(IT) 수요가 급증한 2022년(19조6500억원)이 역대 최고였으나 연평균 액수가 이를 상회하는 것이다.
전례 없는 반도체 불황이 불어닥친 작년 SK하이닉스는 감산에 돌입하는 등 SK그룹 편입 초기와 유사한 수준의 자본적지출(CAPEX) 6조5910억원을 기록한 바 있다. 올해를 기점으로 수직상승하는 흐름이다.
투입 금액 중 80%(82조원)는 고대역폭 메모리(HBM) 등 AI 관련 사업에 활용하기로 했다. HBM은 여러 개 D램을 쌓아 만드는 고부가 메모리다. 그래픽처리장치(GPU) 등 AI 가속기와 짝을 이뤄 AI 서버 핵심으로 꼽힌다.
HBM이 등장한 건 10여년이지만 그동안 제대로 된 응용처가 없어 존재가 잊혀진 상태였다. 하지만 지난해 챗GPT 중심으로 AI 수요가 폭발하면서 HBM 가치가 급등했다. 상대적으로 소홀했던 경쟁사와 달리 SK하이닉스는 HBM 연구개발(R&D)을 이어가면서 선도적 지위를 확보했다.
SK하이닉스는 엔비디아와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HBM 선두를 공고히 하고 있다. 4세대(HBM3) 및 5세대(HBM3E) 제품을 사실상 독점하고 있다. 뒤이어 마이크론이 5세대 HBM 공급에 돌입했으나 아직 물량 차이가 크다. 메모리 최강자 삼성전자는 여전히 테스트 단계에 머물러 있다.
HBM 1위의 공세에 경쟁사는 긴장하는 분위기다. 삼성전자와 마이크론도 매년 생산량을 대폭 늘릴 계획이었으나 이대로면 SK하이닉스와의 격차를 좁히기 힘들 것이라는 평가가 나온다.
우려 요소도 있다. AI 반도체 구매가 폭발적이지만 어느 시점이면 재고 조정을 위한 주문량 감소가 나타날 수 있기 때문이다. 3사가 경쟁적으로 생산능력(캐파)을 증대하다 보면 공급과잉으로 연결될 수 있다는 분석이 나오는 배경이다.
반도체 업계 관계자는 "일부의 우려가 있는 건 사실이나 HBM은 기존 메모리와 달리 맞춤형(커스터마이징) 제품이다. 고객이 약속한 물량이 있다는 의미"라면서 "SK하이닉스 등이 많은 자금을 집행하는 확실한 근거가 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자금 조달 방안 관건, 최태원 미국 출장 성과 주목
향후 과제로는 대규모 투자금을 조달할 방안 마련이 꼽힌다. SK하이닉스의 경우 작년 4분기부터 흑자로 돌아섰지만 이전 4개 분기 연속 적자를 기록한 바 있다. 이에 따라 지난해 수처리센터를 SK리츠에 매각하는 등 자금 확보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연이어 영업손실을 내고도 HBM 투자가 가능했던 건 엔비디아의 선급금이 한몫했다. 다만 HBM 경쟁이 치열해지는 만큼 엔비디아가 이전처럼 SK하이닉스에만 힘을 실어줄 가능성은 작다.
이에 대해 SK하이닉스는 자신감을 나타내고 있다. 실적 개선세가 빠른 데다 수요가 확실하다는 이유에서다.
앞서 김우현 SK하이닉스 최고재무책임자(CFO)는 "시장 전망을 봤을 때 캐시는 당연히 증가할 것"이라면서 "필수 투자는 영업현금흐름으로 충분히 대응 가능하다고 판단하고 있다"고 밝힌 바 있다.
같은 맥락에서 최태원 SK그룹 회장의 행보도 주목할 만하다. 미국 출장 중인 최 회장은 엔비디아, 마이크로소프트(MS), 인텔, 아마존 등 빅테크의 빅샷들과 연이어 회동하고 있다. AI 반도체가 메인 의제로 다뤄지는 가운데 SK하이닉스와 협업을 원한다는 후문이다.
다만 일련의 과정에 대해 또 다른 해석도 있다. 이미 발표한 용인(클러스터), 청주(M15X), 미국(첨단 패키징) 등 투자 계획을 합친 것일 뿐 새로울 게 없다는 의견이다.
재계 관계자는 "(SK하이닉스 투자 건은) 최 회장 소송 이슈를 비롯한 SK그룹 안팎의 이슈를 가리기 위한 방패로 삼은 것 아니냐는 이야기도 나온다"며 "앞으로 이번 위기를 어떻게 극복할지 지켜봐야 할 것"이라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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