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전자의 반도체 및 디스플레이용 장비 제조 자회사 세메스의 재고자산이 올해 3분기 급증했다. 전분기 대비 크게 늘어난 재공품으로 전체 규모가 확대된 것이다. 반도체 수요 둔화 우려에도 설비투자(CAPEX) 계획을 유지한 삼성전자의 신규 증설라인에 대응한 것으로 풀이된다. 삼성전자는 최근 평택 3공장 파운드리 라인과 미국 테일러 신규 파운드리 팹의 클린룸(청정실) 구축에 나선 것으로 알려졌다.
매출의 90% 가까이를 차지하는 삼성전자가 CAPEX를 줄이지 않으면서 자회사로써 반도체 장비 상당수를 담당하는 세메스도 숨통이 한결 트였다. 2분기 대규모 수주로 누적 수주총액이 전년 동기 수준을 상회했다. 1분기 70%로 떨어진 공장 가동률도 80% 초반으로 회복됐다. 다만 내년 반도체 공장 준공 일정과 리드타임(주문에서 제조완성까지 기간) 문제 등에 따라 추후 수주계약 건의 이월이 발생할 수 있어 중장기 리스크는 여전하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3분기 급증한 재공품, 삼성전자 CAPEX발 수요 대비 조짐3분기 말 기준 세메스 재고자산은 9905억원으로 전년 말(8031억원) 대비 1900억원 가까이 늘었다. 주목할 점은 재고자산 증가가 2~3분기 간에 급격히 진행됐다는 점이다. 상반기말 재고자산은 8139억원인데 1766억원이 3개월 만에 누적됐다. 이에 재고자산평가손실도 2분기 말 대비 59.7% 늘어난 107억원으로 확대됐다.
누적된 재고자산은 대부분 재공품이다. 전분기 말 5801억원이었던 재공품 규모는 이번 분기 말 7346억원까지 늘었다. 반면 원재료 등 원·부자재 항목은 같은 기간 2323억원에서 2547억원으로 증가 폭이 크지 않았다. 이에 따라 재고자산 가운데 재공품 비중은 지난 2분기(71.3%)보다 늘어 74.2%가 됐다. 생산 중 제품을 의미하는 재공품은 장비사업에선 단기간 내 발생할 수익, 최근 하달된 수주를 반영한다.
세메스는 매출 대부분이 모기업 삼성전자를 통해 발생한다. 삼성전자는 반도체 수요 둔화에도 기존 CAPEX 계획은 유지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4분기 18조원 규모 CAPEX도 그대로 집행할 예정인데 3분기 세메스의 재공품 급증 역시 이에 대한 대응의 일환인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 삼성전자는 평택 3공장 파운드리(반도체 수탁생산) 라인과 미국 테일러 파운드리 팹의 클린룸 구축에 나섰다. 클린룸은 반도체 생산공간으로 외기조화기(OAC) 등이 구축된 후 반도체 장비 등의 셋업이 진행된다. 삼성전자는 클린룸을 먼저 만든 뒤 장비 투입을 결정하는 셸 퍼스트 전략을 사용한다. 이번 세메스 재공품 증가는 증설 중인 삼성전자 생산라인에 본격적으로 장비 배치가 시작될 조짐인 셈이다.
◇수주총액·가동률 양호, 리드타임 나비효과 등 중장기 리스크도3분기 말 세메스의 반도체 장비 수주총액은 2조807억원 규모다. 지난해 동기 기록된 1조9630억원보다 소폭 늘었다. 2분기 1조781억원 상당의 대규모 수주가 발생했던 데다 3분기에도 2737억원을 수주 받았기 때문이다. 반도체 투자 둔화 등으로 납기 이월 리스크는 있으나 최소한 현재까지 삼성전자에서 세메스에 발주한 규모는 줄어들지 않았다.
수주총액 중 매출로 전환된 금액을 뜻하는 기납품액도 적정 수준이다. 세메스 기납품액은 1~3분기 간 3987억원, 5007억원, 4440억원을 기록했다. 반도체 장비 사업은 셋업과 검수를 완료한 뒤 매출인식이 이뤄진다. 따라서 고객사 사정 등으로 장비 투입이 이월될 경우 기납품액 증가 추이도 둔화된다. 3분기 규모는 전분기 대비 줄었으나 감소분은 크지 않았던 만큼 심각한 이월이 벌어지지 않았던 것으로 풀이할 수 있다.
재공품 및 수주총액 등 매출 선행지표가 증가하면서 세메스의 공장 가동률도 다시 상승하는 추세다. 반도체 장비 가동률이 지난해 2분기 말 98%에서 올 1분기 말 74%로 떨어졌으나 전분기 말 80%를 기록하더니 3분기에는 83%까지 상승했다. 누적 생산실적도 지난해 3분기보다 못하지만 2323대 생산으로 비슷한 수준까지 근접했다. 물류자동화(OHT) 기기의 생산이 크게 증가해 생산실적을 견인한 것으로 나타났다.
다만 일각에서는 여전히 중장기 리스크가 상존한다는 시선도 존재한다. 증권사 한 관계자는 "삼성전자 평택 3공장은 이미 설비입고 계획이 상당부분 지연됐던 탓에 더 이상 주요 장비업체들의 이월이 발생하긴 어려운 상태였다"며 "내년에 정상적으로 삼성전자의 CAPEX가 진행돼도 인프라 구축 지연 및 리드타임 문제에 따라, 장비업체들의 추가 수주가 감소하거나 기존 입고 계획이 이월될 가능성은 여전히 높다"고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