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전자가 불경기로 제품판매에 어려움을 겪으며 재고가 급증하자 가전·스마트폰(DX) 부문 가동률을 줄여 관리에 들어갔다. 다만 SK하이닉스가 시설투자 감축(CAPEX cut)을 선언한데 반해 삼성전자 반도체·디스플레이(DS) 부문은 투자를 줄이지 않기로 했다.
DS부문은 산업 특성상 가동률이 줄이기 어려운 구조라 CAPEX를 컷하지 않고는 생산량을 줄이지 못한다. 이를 두고 삼성전자가 '치킨게임(Chicken game)'을 시작했다는 분석이 솔솔 나오고 있다.
◇가동률 낮춰 재고조절 들어간 DX부문
삼성전자의 3분기 말 기준 재고자산은 57조3198억원으로 전분기(52조922억원) 대비 10% 증가했다. 재고평가손실로 인한 평가충당금은 4조원을 돌파했다. 지난해 같은 기간 1조6000억원 수준임을 감안하면 재고부담이 가중됐다.
부문별로 보면 DS부문이 26조3652억원으로 전분기(21조5080억원) 대비 22.6% 급증했다. 특히 완제품 재고자산이 15.4% 늘었다. 같은 기간 DX부문은 27조1490억원에서 27조974억원으로 소폭 줄었다. SDC(삼성디스플레이)는 2조7739억원으로 전분기(2조4699억원) 대비 12.3% 늘었다.
그나마 DX부문은 생산량을 줄여 재고수준을 조절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3분기 영상기기 생산라인 가동률은 75.4%, 휴대폰(HPP)은 72.2%로 3년 내 최저 수준으로 떨어졌다. 올 1분기만 하더라도 각각 84.3%, 81% 수준이었다.
1년 내 재고가 매출로 몇 번 전환되는지 가늠하는 재고자산회전율 역시 3.8회로 전년 말(4.5회) 대비 떨어졌다. 재고자산이 매출로 전환되는 기간이 길어졌고 그만큼 현금화하는 기간도 늘어났다는 뜻이다.
◇반도체는 가동 멈추기 어려워, 재고소진 위해선 저가공세?
문제는 반도체의 경우 가동률이 줄이기가 어렵다는 점이다. 반도체 공장은 하루 24시간, 1년 내내 쉬지 않고 가동해야 하는 체제라 한번 가동을 멈추면 재가동을 시작해 제품을 생산하기까지 6개월 이상 걸린다.
업계 관계자는 "얼마 전까지 반도체 부족이슈가 생긴 것도 코로나19가 확산되면서 경기 악화를 우려한 반도체 업체들이 생산량을 줄였다가 엔데믹 시점부터 전자제품 소비가 증가하자 반도체 생산량을 다시 늘리는데 6개월 이상이 걸리니까 부족 현상이 지속됐던 것"이라고 설명했다.
다시 생산량을 늘린 상황에서 전쟁과 경기침체 우려가 커지자 감산 이슈가 불거졌다. 쓰임새가 다양한 시스템 반도체는 몰라도 메모리 반도체는 대응이 쉽지 않다. SK하이닉스가 CAPEX 컷을 선언한 것도 시설투자 감축으로 사실상 감산을 천명한 것이다.
다만 삼성전자는 투자축소를 생각하지 않고 있다. 낸드플래시에 대해선 "가격탄력성을 적극 활용해 수요를 창출하겠다"고 3분기 컨퍼런스 콜을 통해 발표했다. 시장에선 가격탄력성을 자극하기 위해선 고객에게 낮은 가격을 제시하는 게 불가피하는 반응이 나왔다.
삼성전자가 치킨게임에 나선 것 아니냐는 관측이 나오는 이유다. 실제 반도체 산업의 현 구조는 치킨게임 끝에 탄생했다. 2007년 대만 D램 업체들이 처음으로 출혈경쟁을 벌이면서 시장점유율 2위 독일 키몬다가 파산했고 2010년 2차 경쟁 당시에는 일본 엘피다가 무너졌다. 두 번의 치킨게임 끝에 메모리 시장은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마이크론 등 3강 구도로 재편됐다.
시장 관계자는 "이재용 부회장이 회장으로 승진한 만큼 외부에선 삼성이 뭔가를 보여줄 시기가 됐다고 생각해 치킨게임설을 제기하고 있는 듯하다"며 "현재 치킨게임이 벌어질 것으로 예상되는 시장은 낸드플래시 분야"라고 말했다.
또 다른 관계자는 "SK하이닉스, 마이크론과 같은 기업은 D램으로 낸드 시황 악화를 견뎌낼 수 있는 여력이 있는 반면 일본 키옥시아, 미국 웨스턴디지털, 중국 YMTC 등 낸드에 집중하고 있는 회사는 얘기가 다르다"며 "특히 미국 제재가 불가피한 YMTC가 가장 피해를 볼 수 있다"고 언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