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출 비중이 높은 현대차그룹에 '강달러' 기조는 긍정적인 시그널이지만 투자 집행 시기엔 그 반대다. 특히 달러화로만 집행이 가능한 미국 현지 투자건의 경우 최근의 원·달러 환율 상승세가 부담스럽다.
올해만 해도 현대차그룹은 미국에 총 105억 달러 규모의 투자를 추진하기로 결정했다. 기한은 2025년까지이지만 달러화 현금출자 등을 순차적으로 집행해야 하는 만큼 현재의 고환율 영향을 피하긴 어려울 것으로 관측된다.
미국 투자금 105억 달러에 현재 1달러당 1440원의 환율을 적용하면 약 15조1200억원이다. 이는 같은 기간 현대차그룹 국내 투자(63조원)에 비하면 4분의 1 수준이지만 공개된 해외 투자 중에선 가장 많은 금액이다.
올해 5월 말 원·달러 환율은 달러당 1280원이었던 만큼 투자 결정 당시의 투자금 규모는 원화 13조4400억원 수준이었다. 불과 4개월만에 투자비용 예상 부담이 1조6800억원 늘어난 셈이다. 환율 상승 기세가 이어져 1500원 선까지 올라가면 추가부담은 더 증가한다.
최근엔 이 같은 외부변수 부담으로 인해 투자를 중단하는 기업들도 나오고 있다. 최근 현대오일뱅크는 충남 서산 대산공장에 원유정제설비(CDU), 감압증류기(VDU) 설비를 탑재하려던 3600억원 규모 투자를 중단했다.
원·달러 환율과 원자재 수입 가격 상승 등으로 초기 투자 결정 시 계산했던 수익성을 달성하기 어렵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한화솔루션도 이달 초 1600억원 규모의 질산유도품(DNT) 생산 공장 설립 계획을 접기로 결정했고 SK하이닉스도 충북 청주 M17 반도체 공장 증설을 보류했다.
다만 현대차그룹은 이 같은 변수 때문에 미국 투자 계획을 번복하는 일은 없을 것이란 입장이다. 현대차그룹 관계자는 "최근 투자를 포기한 기업들과 달리 (현대차그룹은) 이제 본격적으로 투자를 결정한 시기"라며 "2025년까지이니 초반보단 후반에 투자금이 많이 들어갈 것으로 전망된다"고 말했다.
대신 갈수록 가파라지는 환율 상승세에 일부 투자는 집행을 신속히 서둘렀다. 지난달 11일 이사회 결의를 거쳐 미국에 인공지능(AI) 연구소 설립을 위한 보스톤 다이내믹스 AI 인스티튜트(가칭) 법인을 같은달 16일 설립했다.
현대차그룹에 따르면 AI 연구소 설립에 뛰어든 현대차, 기아, 현대모비스는 같은달 말에 현금출자를 통한 지분 보유까지 마쳤다. 현대차 2억1200만 달러, 기아 1억2700만 달러, 현대모비스 8500만 달러 등 총 4억2400만 달러 현금출자를 통해 각각 지분 47.5%, 28.5%, 19%를 취득했다. 빠른 집행 덕에 이사회 결의 당시(1310원)와 현금출자 시기(1360원) 간 달러당 원화 차이는 50원에 불과했다.
특히 최근 현대차그룹은 환경에 대한 관심이 높고 전기차 수요가 많은 미국 시장에 전기차 생산 거점을 확보하는 데 매진하고 있다. 이를 위해 현대차그룹은 지난 4월 제네시스 GV70 전동화모델(EV)의 연내 미국 생산(현대차 앨라배마 공장)을 발표한 데 이어 5월 전기차 전용 공장 및 배터리셀 공장 설립을 확정했다.
업계 관계자는 "연내 투자 집행을 완료해야 하는 건 환율이 비교적 저렴한 초기에 끝내는 게 유리하다는 판단"이라며 "중장기 투자건은 한동안 환율 추이를 지켜보는 경우가 지배적인 것 같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