업력 13년차 연 매출 3조원에 달하는 삼성바이오로직스. 출범한 지 1년을 조금 넘겼지만 매섭게 인지도를 끌어올리고 있는 롯데바이오로직스. 위탁생산(CMO) 사업으로 묶인 두 기업은 미묘한 경쟁 관계에 있다.
최근 삼성바이오로직스가 롯데바이오로직스가 생산 중인 제품과 같은 제품의 수주 계약을 따내면서 양사 간 신경전이 치열해지는 분위기다. 글로벌 제약사(빅파마)와 바이오텍을 향한 두 기업의 같은 듯 다른 전략도 눈길을 끈다.
◇다윗 대 골리앗, 두 국내 CMO사 미묘한 관계
삼성바이오로직스와 롯데바이오로직스는 규모 면에선 비교가 되지 않는다. 2011년 설립한 삼성바이오로직스는 세계 최대 규모 바이오의약품 생산 시설을 갖추며 이미 글로벌 시장의 CMO 강자로 자리매김했다. 연결 기준 지난해 매출과 영업이익은 각각 3조13억원, 9836억원을 기록했다.
반면 롯데바이오로직스는 지난해 7월 롯데지주 자회사로 출범했다. 롯데그룹이라는 든든한 버팀목이 있지만, 아직 제대로 된 생산 설비조차 갖추지 않았다. 연내 국내 생산기지인 송도 메가 플랜트 착공을 앞뒀다. 사실상 바이오벤처와 다름없다.
그럼에도 삼성바이오로직스에 있어 롯데바이오로직스는 꽤 신경 쓰이는 존재다. 출범과 동시에 브리스톨 마이어스 스큅(BMS)으로부터 미국 뉴욕 시러큐스 공장을 사들이며 단숨에 생산 거점은 물론 안정적인 계약 물량까지 확보했다. 삼성바이오로직스는 해외 빅파마를 주요 고객사로 두고 있음에도 국내 공장만 보유 중이다.
이원직 롯데바이오로직스 대표가 삼성바이오로직스 출신이라는 점도 의식하게 하는 요소다. 이 대표는 삼성전자 신사업추진단에 합류해 삼성바이오로직스 출범에 참여한 인물이다. 삼성바이오로직스에서 품질팀장, 완제의약품 사업부장 등을 거쳐 10여 년간 근무했다. 이에 더해 롯데바이오로직스는 삼성바이오로직스 핵심 인력을 대거 채용했다.
실제 삼성바이오로직스는 이직한 직원 4명을 상대로 고소했다. 이후 검찰은 3명을 무혐의 처분하고 1명을 기소했다. 지난달 말 첫 공판이 열렸다. 이외에도 롯데바이오로직스에 4차례에 걸쳐 내용증명을 송부하는 등 영업비밀과 인력 유출 행위에 대해 대응 중이다.
◇롯데 유일 매출원 BMS 제품, 삼성도 수주 맡는다
이런 상황에서 삼성바이오로직스가 최근 BMS 자회사와 3213억원 규모 면역항암제 장기 CMO 계약을 체결했다고 발표했다. 계약에 따라 제품명을 공개하진 않았지만, 해당 제품은 롯데바이오로직스가 시러큐스 공장에서 생산하고 있는 제품과 같은 것으로 알려졌다. 오는 2030년까지 4공장에서 생산하게 된다.
시러큐스 공장 계약이 유일한 매출원인 롯데바이오로직스로선 반갑지 않은 소식이다. 롯데바이오로직스가 생산 중인 제품은 면역항암제 '옵디보', '여보이', 신장이식면역억제제 '뉴로직스', 다발성골수종치료제 '엠플리시티' 등 4개다. 공장 인수 당시 BMS와 3년 동안 총 2800억원 규모로 CMO 계약을 맺었다.
현재 상당 부분의 계약 물량 생산이 이뤄진 상태다. 남은 계약 물량이 끝나기 전에 추가 수주를 따내야 하는데 경쟁사가 같은 제품을 생산하면 계약이 변경되거나 계약 규모가 줄어들 가능성이 있다. 아직 롯데바이오로직스가 공식적으로 발표한 신규 수주 계약은 없다.
무엇보다 전체적인 판도가 삼성바이오로직스의 '판정승'으로 귀결된 모양새다. 통상 바이오의약품 CMO의 경우 생산지를 변경하는 일이 많지 않다. 허가 절차 등에 오랜 시간과 비용이 들기 때문이다. 이번 삼성바이오로직스와 BMS 계약 건은 기존에 CMO하지 않았던 신규 제품에 대한 내용이다.
삼성바이오로직스는 이런 점을 외부에 알리는 데 주력하고 있다. 보도자료를 통해 "BMS는 첫 고객사로 인연을 시작한 이후부터 신규·증액 계약을 체결하며 10년 넘게 파트너십을 지속하고 있다"면서 "이는 당사의 세계 최대 생산능력, 초스피드 생산 속도, 높은 품질을 바탕으로 고객사 신뢰를 쌓은 덕분"이라고 경쟁력을 강조했다.
다만 롯데바이오로직스는 삼성바이오로직스의 이번 계약이 시러큐스 공장 수주 물량과는 별개라는 점을 분명히 했다. 이에 더해 추가 수주 논의가 꾸준히 오가고 있다는 설명이다. 롯데바이오로직스 측은 "BMS와 계약은 3년 동안 최소 2800억원 규모 생산량을 보전(개런티)하는 게 골자"라며 "1년 안에 생산이 거의 마무리됐다고 계약이 끝나는 게 아니라 정해진 기간 내 계속해서 추가 의뢰를 할 수 있다"고 했다.
이어 "초기 계약에 따라 추가 생산 의뢰 규모를 공개할 수는 없지만 공장 운영에 문제가 없을 정도로 추가 생산 계획이 잡혀 있다"면서 "내년 생산 계획이 거의 차 있고 BMS 외 여러 빅파마가 수주 논의를 위해 시러큐스 공장을 방문했다"고 덧붙였다.
◇빅파마 vs 국내 바이오텍 두고 치열한 눈치 싸움
미묘한 경쟁 관계가 이어지는 가운데 양사의 같은 듯 다른 수주 전략이 눈에 띈다. 그간 삼성바이오로직스는 해외사 수주에 공을 들여왔다. 9월 기준 글로벌 상위 빅파마 20곳 중 14곳을 고객사로 유치했다. 2018년 3곳에서 대폭 늘었다. BMS를 포함해 화이자, 아스트라제네카(AZ), 존슨앤존슨(J&J), 일라이릴리, 미국 머크(MSD), 로슈, 글락소스미스클라인(GSK) 등 내로라하는 빅파마를 섭렵했다.
후발주자 롯데바이오로직스는 이 틈을 파고들었다. 국내 바이오텍에 지분 투자를 단행하거나 공동 연구 협업을 맺은 게 대표적이다. 중소 바이오 기업과 상생을 도모하는 차원에서 바이오벤처 이니셔티브 구축에도 나섰다. 바이오텍이 임상을 목적으로 요청한 소규모 CMO 수주에 대해서도 활발하게 검토하고 있다는 후문이다. 당장 돈이 되지 않더라도 다양한 기업과 접점을 늘리며 '내 편'을 만들겠다는 구상이다.
공교롭게도 최근 들어 삼성바이오로직스 사업 전략에 변화가 감지된다. 삼성그룹 차원에서 국내 바이오텍에 대한 투자를 늘리려는 움직임이 일고 있다. 삼성물산과 삼성바이오로직스·삼성바이오에피스가 조성한 라이프 사이언스 펀드가 네 번째 투자처로 국내 바이오텍 에임드바이오를 선정했다. 앞선 세 건의 투자가 모두 해외 기업을 대상으로 진행됐다는 점을 고려하면 이례적인 행보다.
한편 빠르게 외형을 키우고 있는 롯데바이오로직스 입장에서도 빅파마 수주는 절실하다. 바이오의약품 CMO에서 중요한 건 '트랙레코드'. 수주 경험이 많지 않은 상황에서 벌어진 역량 차이를 극복하기 위해 주요 기술 등을 외부에서 도입할 필요성이 제기된다. 롯데바이오로직스가 올 초부터 국내 항체약물접합체(ADC) 비상장 바이오텍부터 유럽 소재 ADC 바이오텍까지 플랫폼 기업 인수를 적극적으로 타진했던 것도 이와 무관치 않다.
바이오 업계 관계자는 "규모로 따지면 삼성바이오로직스와 롯데바이오로직스를 비교하는 게 이상하지만 같은 사업 모델을 추구하는 만큼 서로를 의식할 수밖에 없다"면서 "CMO 사업 특성상 한 번 수주를 따내면 장기 계약이 이어지기 때문에 파트너사 확보가 향후 관전 포인트가 될 것"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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