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조기업에 재고자산은 '딜레마'다. 다량의 재고는 현금을 묶기 때문에 고민스럽고, 소량의 재고는 미래 대응 능력이 떨어진다는 점에서 또 걱정스럽다. 이 딜레마는 최근 더 심해지고 있다. 공급망 불안정에 따른 원재료 확보의 필요성과 경기침체에 따른 제품 수요의 불확실성이 샌드위치 형태로 기업을 압박하고 있기 때문이다. 더벨은 기업들의 재고자산이 재무에 미치는 영향 등에 대해 살펴본다.
현대일렉트릭앤에너지시스템(현대일렉트릭)은 지난해 대규모의 신규 수주를 발판으로 수주 잔고를 대폭 늘려뒀다. 전력인프라기기의 생산 주기상 늘어난 잔고의 매출 전환은 올해 중 진행된다.
가파른 재고자산 증가 추세를 고려하면 잔고를 기반으로 매출을 늘려갈 준비가 갖춰진 것으로 분석된다. 다만 재고자산 규모를 늘려가는 동안 현금을 통한 위기 대응능력이 감소했다는 점, 생산능력의 증가 여력이 재고자산 운용 효율 하락분 대비 적다는 점 등은 과제로 파악된다.
현대일렉트릭은 2022년 29억6000만달러(3조7000억원가량)어치 전력인프라기기를 수주했다. 전년 수주금액 18억5600만달러보다 59.5% 증가했다. 지난해 수주목표였던 18억2600만달러보다는 62.1% 많다.
통상 전력기기나 배전기기, 회전기기 등 현대일렉트릭의 생산 제품들은 수주잔고의 매출 전환이 1년 안팎에 걸쳐 이뤄진다. 당해 수주한 일감이 당해~이듬해에 반영된다는 뜻이다. 그리고 현대일렉트릭은 지난해 연결기준 매출 2조1045억원, 영업이익 1330억원을 냈다. 전년 대비 매출이 16.5%, 영업이익이 45.7% 늘었다. 애초에 2021년의 수주도 적은 것이 아니었다는 말이다.
현대일렉트릭에게 남은 과제는 지난해 대량의 수주를 매출로 소화하는 것이다. 단순히 연말 기준 수주잔고를 봐도 2022년의 27억1300만달러는 전년도의 17만9800달러 대비 50.9% 급증한 수치다. 이에 현대일렉트릭도 지난해 내내 과제에 대비해 온 것으로 파악된다.
현대일렉트릭은 지난해 3분기 말 기준 재고자산이 6062억원으로 집계됐다. 전년 말 대비 69.8% 급증했다. 기존 몇 년 동안 3000억원대에 머물러 있던 재고자산이 지난해 폭발적으로 늘어났다는 것은 그만큼 전년도 수주가 이례적이었다는 뜻이다.
수주산업 회사들은 선주문 후제작의 사업 구조를 지닌 만큼 일반적으로 재고자산에서 제품이나 상품의 비중이 크지 않다. 현대일렉트릭과 같은 전력인프라기기회사들의 경우 사업 성과로 연결되는 재고자산 항목은 재공품과 원재료다. 그리고 현대일렉트릭은 재고자산 중 재공품과 원재료가 지난해 분기마다 늘어나는 모습이 나타났다.
재공품은 당장 생산작업을 진행 중인 물량으로 눈앞의 실적과 직결된다. 원재료는 재공품 단계를 거쳐 완제품으로 생산된 뒤 인도되는 미래 매출의 지표다. 이 두 항목이 함께 늘어나고 있다는 점은 현대일렉트릭이 제품 생산 주기인 1년여 동안 꾸준한 매출 증가를 기대할 수 있다는 것을 시사한다.
물론 이러한 변화가 재무구조의 관점에서는 긍정적이라고만 볼 수는 없다. 기업의 재고자산 증가는 현금에 부담을 가하는 요인이기 때문이다.
현대일렉트릭의 현금 보유량(현금 및 현금성자산과 단기금융상품의 합계)은 2020년 5348억원으로 정점을 찍은 뒤 2022년 3분기 말 기준 1668억원까지 줄었다. 글로벌 경기둔화로 기업의 현금소요 대응능력이 갈수록 중요해지는 상황에서 현대일렉트릭의 현금 감소세는 불안요소가 될 수 있다는 평가도 나온다.
현대일렉트릭 관계자는 “재고자산 확대의 반대급부로 현금 보유량이 줄어든 점에 대해 내부적으로도 고민 중”이라며 “올해는 늘어난 재고자산을 매출로 전환해가며 현금 보유량과 재고자산의 균형을 잡는 방향으로 재무구조를 관리해나갈 것”이라고 설명했다.
관건은 현대일렉트릭의 생산능력이 수주물량의 인도기간 내에 재고자산 증가분을 무리 없이 소화할 수 있을 정도로 충분하느냐다. 현대일렉트릭은 국내와 중국, 미국에 생산법인을 보유하고 있으며 지난해 1~3분기 3곳의 평균 가동률은 94.8%에 육박해 있다.
반면 현대일렉트릭의 재고자산 회전횟수(연환산 매출원가를 기초 재고자산과 기말 재고자산의 평균치로 나눈 값)는 평년 4회 이상을 유지하다 지난해 들어 감소세를 보이며 2022년 3분기 말 기준 3.3까지 낮아졌다. 가동률의 개선 여지보다 회복해야 할 재고자산 운용 효율이 더 크다고 볼 수 있다.
현대일렉트릭 관계자는 “현재 가공분야와 같은 일부 생산과정을 외주로 돌리는 방안을 검토 중”이라며 “공장 가동을 최대한 효율화해 재고자산의 소화에 차질을 빚지 않도록 노력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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