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
'크레딧 애널리스트 3명이 모이면 지구가 망한다' 자본시장에 떠도는 우스갯소리다. 그만큼 보수적이고 비판적이라는 뜻이다. 실제로 그들의 수다는 어둡다. 그러나 통찰이 있다. 수면 위로 떠오르지 않는 자본시장 내 불안요소가 드러난다. 더벨이 그들을 만났다. 참여 애널리스트의 자유로운 의견 개진을 위해 소속과 실명은 밝히지 않기로 했다.
ESG채권(사회책임투자채권, SRI채권) 시장이 고꾸라졌다. 지난해까지만 해도 대기업들이 앞다퉈 ESG채권을 발행했던 것과 상반된다. ESG채권에 관심을 두는 일반 기업, 투자자 소식이 좀처럼 들리지 않는다. 공기업과 여신전문금융사에서 간간히 발행하는 정도다.
기준금리 인상으로 기업들의 펀더멘탈이 흔들린 데다 공모 회사채 시장이 급격히 위축된 결과라고 업계 관계자들은 입을 모은다. 조달비용을 한 푼이라도 아끼기 위해 허리띠를 졸라매는 상황에서 인증비용까지 치러가며 ESG채권을 발행할 여력이 없다는 의미다.
정부 기조 변화도 ESG금융시장의 성장에 제동을 걸었다. 2020년 말 국민연금은 2022년까지 책임투자 자산규모를 전체의 50%로 확대, 직접운용자산 280조원 중 30%, 위탁운용자산 전부에 ESG투자를 적용하겠다고 발표했지만 정권이 바뀌면서 상황도 달라졌다.
그렇다면 내년 상황은 어떨까. ESG채권 시장으로 기업들의 관심이 돌아올까. 정부는, 투자자들은 ESG채권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을까. 더벨이 물었다.
◇국민연금 ‘깜깜무소식’에 발행사·투자자 ‘주춤’
A: ESG에 대한 정부의 관심이 떨어진 게 피부에 와닿는다.
C: 자산운용사 등 기관투자자가 ESG에 관심을 둔 건 국민연금을 필두로 연기금이 ESG 관련 투자를 확대하겠다고 밝혔기 때문이다. ESG 트랙레코드를 쌓으려고 ESG펀드를 만들고 조직도 세웠는데 정부가 바뀌니까 국민연금도 ESG에 아무 생각이 없는 것 같다.
B: 그리니엄*이 나타나서 일반 기업들이 ESG채권을 많이 발행하게 하려면 국민연금이 나서는 수밖에 없다. 국민연금이 채권시장의 큰 손이니까. 근데 국민연금 자체가 깜깜무소식이니까 투자 열기가 식은 거지.
*그리니엄: 그린(Green)과 프리미엄(Premium)의 합성어. 녹색채권 등 ESG채권의 차입비용(조달 금리) 등이 일반 채권보다 낮게 책정되는 금리 프리미엄을 의미.
C: 자산운용사들은 일단 ESG보고서를 계속 쓰고 있긴 하지만 국민연금이 보는 것 같지는 않다. ESG와 관련해 어떤 조직체계를 갖췄고 어떤 투자 방침을 세웠는지, 투자대상 기업의 ESG성과를 어떤 식으로 평가하는지 등 내용이 담긴 보고서다. 올해는 국민연금 등 연기금 쪽에서 ESG 관련 자금집행을 거의 진행하지 않은 것 같다.
A: 정부 방침이 달라지니까 공기업도 ESG 관련 조직을 아예 없앴다더라. 기획부서에서 담당자가 보고서를 쓰는 식으로 처리한다던데.
C: 정부도 시들한 마당에 인력까지 투입해가며 ESG 조직을 만들어야 할까 싶었던 모양이다. 그냥 KPI나 운용철학에 녹이는 식으로 대응해도 될 거라고 생각한 것 같다.
B: 결국 ESG는 관련 인력의 몸값만 높인 꼴이 됐다. ESG평가기관 인력이 자산운용사나 대기업으로 억대 연봉을 받으면서 많이들 옮겨갔다더라. ESG전문가가 한정적이다보니 지난해에 ‘모셔가기’ 경쟁에 불이 붙었다.
C: 가긴 갔는데 올해 ESG가 시들한 바람에 존재감이 많이 약해졌지.
◇돈 안 되는 ESG “손해만 봤다”…SLB 대안 될까
B: 투자자 입장에서도 ESG채권은 투자할 유인이 없다. 자산운용사들은 당장 펀드 환매 수요에 대응하느라 ESG채권을 쳐다 볼 여유가 없다. 펀드부터 살려놔야지.
C: ESG채권을 운용하는 투자자 얘기를 들어보면 올해 피를 철철 흘렸다고 한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때문에 방산과 석유기업들은 신보다 돈을 많이 벌었다고 하는데 이것만 빼고 투자했잖나.
B: ESG펀드를 더 이상 운용하고 싶지 않다는 투자자도 많다. 비교적 규모가 작은 자산운용사들은 네거티브 방식으로 ESG펀드를 운용한다. 네거티브는 기계적으로 담배, 방산, 석유회사를 투자대상에서 빼는 방식인데 정확히 이 섹터가 올해 대박이 났다. 핑계라고만 보기에는 ESG펀드 수익률이 전반적으로 나빴던 건 사실이다.
A: 마땅한 투자대상이 없는 것도 ESG채권 시장이 위축된 요인인 것 같다. 한국 ESG채권 시장은 목적 채권, 그러니까 자금 투입 프로젝트가 ESG에 부합하느냐에 따라 ESG채권 여부를 가린다. 여기에 회의감을 느끼는 투자자도 많다. ESG성과는 형편없는 회사가 태양광 발전에 투자한다고 ESG채권을 발행하면 진정성이 떨어지니까.
C: 그래서 요즘에는 한국ESG기준원이나 서스틴베스트 등에서 매긴 기업 ESG등급을 보고 ESG투자를 결정하는 게 더 발전적이라는 생각도 든다. 기업이 자체적으로 ESG경영 여부를 점검하도록 유도한다는 점에서도 긍정적이다. 꼭 ESG 프로젝트에만 조달자금을 투입해야만 할까?
B: 지속가능연계채권(SLB)이 앞으로 뜰 것 같다. SLB는 발행사가 지속가능성을 높이는 목표를 세워서 달성하면 투자자가 금리를 깎아주고, 달성하지 못하면 발행사가 돈을 더 내는 방식으로 이자가 결정된다. SLB는 일반 기업의 ESG경영의 유인이 될 수 있다. 전세계적으로도 ESG채권 발행이 감소하는 와중에 SLB는 견조하게 유지돼서 비중이 확대됐다.
A: 한국거래소가 올 9월에 SRI채권 플랫폼에 SLB 세그먼트를 열어서 기대가 된다. 아직 SLB를 발행하겠다는 기업 소식이 들리지는 않지만.
◇‘곳간에서 인심난다’, 일반 기업 ESG채권 발행 여력 없어
A: 발행사 입장에서 ESG채권 시장을 보면 ‘곳간에 인심 난다’는 말이 꼭 들어맞는다. 사정이 좋아야 ESG채권도 발행하는 거다. 회사채 발행 자체가 막혀서 ESG채권을 발행하기가 어렵다. ESG채권이라고 금리를 깎아주는 것도 아니고.
C: 맞다. 그리니엄이 없다. 지난해에는 국민연금이 ESG투자를 확대하겠다고 밝히면서 그리니엄이 나타나지 않을까 했는데 이런 기대가 시들었다.
B: 일반 기업 관계자들을 만나보면 시장이 생각하는 것보다 사정이 훨씬 나쁘다. 정말 어려워서 투자할 여력이 없어 보인다. 일단 회사채 발행이 힘들다 보니 장기자금이 드는 사업은 엄두도 못 낸다. 만기 1년짜리 은행 대출 받기도 빡빡해서 장기 계획을 세울 여유가 없다.
A: 이자비용도 어마어마하다. 기준금리 인상기 이전보다 이자비용이 두 배 넘게 늘었다.
B: 더 이상 투자할 만한 ESG 프로젝트가 없다는 것도 문제다. 태양광발전소를 매년 지을 수도 없는 노릇이잖나. 실적이 좋으면 ESG 투자를 늘리겠지만 그렇지도 않고.
C: 지난해까지는 기업들이 ESG 관련 자산을 짜내서 ESG채권을 발행했는데 이제는 한계에 부딪혔나보다.
A: 내년에도 ESG채권 발행시장은 어려울 거다. 좀처럼 유인이 보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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