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신용평가사 3사의 올해 상반기 정기 신용평가가 모두 마무리됐다. 연초만 해도 기업들의 실적부진으로 인해 신용등급이 대거 하향조정될 것으로 봤으나 예상보다는 변동폭이 크지 않았다. 신용평가사별로 조정폭에 차이를 보이면서 각 회사의 기조를 보여주기도 했지만 발행사들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었다는 것이다.
증권사 IB들은 "신용평가사에 따라 발행사의 눈치를 보면서 등급을 조정한 게 아니냐"는 해석을 내놓기도 했다. 예상보다 등급 하향에 소극적이었다는 뜻이다. 현재 국내 기업들의 신용등급은 의뢰를 받아서 이뤄지는만큼 신용평가사들이 향후의 이해득실을 고려했을 것으로 봤다.
◇ 크레딧 이슈 대비 등급 조정폭 적었다 2023년 상반기 한국기업평가는 15곳, 한국신용평가와 나이스신용평가는 각각 11곳의 장기신용등급을 하향조정한 것으로 집계됐다. 반면 등급 상향건수는 나이스신용평가가 12건으로 가장 많았고 한국신용평가가 7건, 한국기업평가가 5건이었다.
등급이 변동된 기업 중 신용평가사 3사가 일치된 흐름을 보인 곳은 많지 않았다. 등급 상향이 된 곳 중에서도 기아자동차(AA+)나 현대캐피탈(AA+) 두 곳, 등급 하향이 된 곳은 롯데케미칼(AA0), 롯데지주(AA-), LG디스플레이(A0) 등 세 곳만 등급 평정이 동일했다.
등급 전망 역시 비슷한 방향성을 보였다. 올해 상반기 기준으로 '부정적' 아웃룩(하향 검토 포함) 기업수 역시 한국기업평가가 35곳으로 가장 많았다. 나이스신용평가 26곳, 한국신용평가는 24곳이었다. '긍정적' 아웃룩(상향 검토 포함) 기업 수는 나이스신용평가가 27곳으로 가장 많았고 한국신용평가와 한국기업평가는 각각 22곳, 16곳이었다.
증권사 관계자는 "지난해 하반기만 해도 레고랜드 사태나 부동산 프로젝트파이낸싱(PF) 이슈 등 크레딧 이슈가 많았던 것에 비해 정작 결과를 보면 등급을 내리는데 보수적으로 접근한 것으로 보인다"며 "등급 하향조정을 하게 되면 기존 투자자들이 신용평가사에 대해 불만이 커지기 때문에 과거 대비 시장의 눈치를 많이 보고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그나마 한국기업평가의 조정폭이 컸다. 한국기업평가가 등급 하향 조정이나 '부정적' 아웃룩을 가장 많이 냈고 나머지 두 곳의 신평사는 상대적로 덜 움직였다. 올 상반기만 하더라도 한국기업평가의 등급 조정이 늦다거나 몸을 사린다는 신용평가업계의 의견도 있었지만 정작 상반기 정기평가 결과는 달랐던 셈이다.
◇ 등급 스플릿 기업, 등급 쇼핑 나설까 올해 신용평가사 3사의 결과가 엇갈리면서 등급 스플릿(신용평가사 간 등급 불일치) 기업들도 많아졌다. 올해 시장의 가장 화두였던 롯데그룹 평정도 3사가 각자 다른 결과를 내면서 롯데렌탈이나 롯데캐피탈, 롯데물산, 롯데오토리스는 등급 스플릿 상태다. SK실트론이나 한국자산신탁 등도 등급 스플릿 상태다.
기업들은 공모 회사채를 발행하지 않아도 기업신용등급(ICR)을 받기도 하지만 주로 등급 의뢰는 무보증 회사채 발행 전에 이뤄진다. 공모채를 발행할 때 채권 복수평가제에 따라 신용평가사 3사 중 2곳의 신용평가사로부터 신용등급을 받아야 한다. 해당 제도는 1995년 도입된 이후 지금까지 유지되고 있다.
각 사별로 등급이 다를 경우 결국엔 등급이 더 높은 곳에서 평가를 받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신용평가업계 관계자는 "각 사별로 평가방법론이 다르기 때문에 등급 평정은 맞다 틀리다의 문제는 아니다"라면서도 "등급 평정으로 기업들과의 관계가 끊어질수도 이어질 수도 있는 것은 사실"이라고 밝혔다.
증권사 IB 관계자는 "전반적인 아웃룩을 보면 연초 생각했던 것보다는 많은 폭의 변동이 있지는 않았다"라며 "원래는 더 칼을 댔었어야 했던거 같은데 안 됐던 것 같고 어찌됐건 신용평가사들도 의뢰를 받아서 등급을 내기 때문에 선제적으로 나서서 조정하기는 부담스러웠을 것"이라고 평했다.
또다른 증권사 IB 관계자는 "현장에 있으니까 발행사와 투자자 입장을 모두 아우르기 때문에 신용평가에 대해 어느 쪽이 더 맞다고 판단하기는 쉽지 않다"며 "발행사 입장에서는 실적 변동성은 불가피한데 등급 전망이나 아웃룩이 변동되니까 너무 세게 신평사에서 움직인다는 생각을 하기도 해서 양쪽의 간극이 있는 것 같다"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