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재계에는 사외이사를 '거수기'로 보는 풍토가 강하다. 회사나 경영진의 입장에 반기를 들기가 현실적으로 쉽지 않다는 이유다. 이에 일정규모 이상의 회사는 반드시 사외이사후보 추천 조직을 꾸리도록 법으로 강제하고 최장 임기(6년)도 정해뒀다. 그럼에도 수십 년간 이어져온 인식이 좀처럼 바뀌지 않고 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한솔제지 이사회의 행보가 눈에 띈다. 한솔제지는 올 상반기 '신사업 보상제도 신설'을 추진했으나 사외이사의 벽에 막혀 무산됐다. 사외이사 전원이 '반대' 의사를 밝혔다. 이를 두고 사외이사 제도가 '제대로' 작동하고 있다는 해석이 나온다.
28일 제지업계에 따르면 한솔제지는 2월 말 이사회에 '신사업 보상제도 신설의 건'을 상정했다. 신사업 추진의 동기부여를 강화하는 차원에서 모회사 대표이사(CEO)에게 인센티브를 지급하는 내용이다. 사실상 M&A 형태로 신사업 기회를 엿보는 만큼 한솔제지 대표이사인 한철규 사장(대표)이 대상이다.
한솔제지 이사회는 사내이사 5명과 사외이사 3명 등 모두 '8인 체제'다. 사내이사진은 조동길 회장과 한 사장, 최원경 사업본부총괄(부사장), 이명길 경영지원본부장(부사장), 최승용 산업용지 사업본부장(상무) 등 5명이다.
사외이사는 김희관 KT 컴플라이언스위원회 위원장과 백복현 회계정보학회 회장, 조영제 법무법인 광장 고문 등 3명이다. 이중 김 이사와 백 이사는 올 3월 신규선임된 인물들이다. 임창묵 21세기 전 전략연구원 수석연구위원과 송재용 서울대 경영학과 교수가 떠난 자리를 두 사람이 채웠다.
'신사업 보상제도 신설'에 대한 논의는 지난 2월 이뤄졌다. 현재가 아닌 직전 이사회의 마지막 회의 자리였다. 하지만 안건은 출석이사 3명의 반대로 가결 정족수를 채우지 못해 무산됐다. 반대에 손을 든 건 임창묵, 송재용, 조영제 등 모두 다 사외이사다. 사외이사 반대로 안견이 부결되는 경우는 상당히 드문 편이다.
이날 이사회에는 이사진 8명 전원이 출석했으나 그 중 6명만 의결권을 행사했다. 조동길 한솔그룹 회장은 기권을 택했고 한 사장은 표결에 불참했다. 본인과 회사간 자기거래에 대한 내용이라는 이유다. 한솔제지 관계자는 "출석 과반의 찬성이 있어야 가결되는 건"이라며 "사외이사 의견을 존중해 부결됐다"고 말했다.
사외이사들은 신사업에 대한 동기부여와 성공을 위해 보상제도를 도입하는 건 좋지만 방향과 지급방식 등을 좀 더 구체화할 필요가 있다는 이유를 들었다. 이사회는 이들의 의견을 받아들여 추가 검토를 거쳐 추후 재상정하기로 했다. 다만 이후 사외이사 2명이 바뀌며 이사회 구성원이 일부 달라졌다. 새로 꾸려진 이사회에 공이 넘어온 셈이다.
한솔제지는 사외이사를 뽑는 방식부터 남다르기로 유명하다. 지배구조 전문가들은 흔히 사외이사후보추천위원회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자산 2조 이상의 기업들은 의무설치하도록 법으로 정해놓은 것도 같은 맥락이다. 별도의 조직이 있어야 보다 전문적으로 적절한 인물을 뽑을 수 있다는 이유다. 최근엔 사추위 자체를 사외이사로만 꾸리는 기업이 늘고 있는 추세다.
하지만 한솔제지에는 사추위가 없다. 이사회가 후보를 선정해 주주총회에 올린다. 일단 자산규모가 2조원 미만(별도 기준)으로 설치 의무가 없다. 그렇다고 해서 설치 자체를 고려하지 않은 건 아니다. 그보단 내부 기준을 엄격히 세우는 게 낫다고 판단했다.
한솔제지 측은 "사추위를 운영하지 않는 대신 사외이사 후보 추천 및 선임시 관련 법령을 엄격히 준수하고 있다"며 "기업지배구조 선진화 관련 기관의 가이드라인을 충실히 반영한 내부기준을 적용하고 있다"고 밝혔다.
내부기준은 △소극적 자격기준과 △적극적 자격기준으로 나뉜다. 소극적 기준은 상법 등 관계 법령에서 요구하는 결격사유가 없으면서 국민연금의 수탁사 책임활동에 관한 지침, 한국기업지배구조원(KCGS)과 ISS의 의결권 행사 가이드라인에 부합하는지 확인하는 정도다. 결격사유 여부를 확인하는 정도로 볼 수 있다.
골자는 '적극적' 기준이다. 전문성과 윤리의식, 충실성, 적합성, 공정 등 '5대 선임원칙'을 고려해 업무수행에 적절한 전문적 지식과 경험을 갖추고 있는지 살펴본다. 특히 상법시행령 제37조 감사위원회 위원 후보자 적격 기준 수준에 따른 근무경력을 갖춘 인물만 전문성을 갖춘 것으로 인정한다.
특히 한솔제지는 2017년 3월 정관에 사외이사는 1회에 한해 연임할 수 있다는 내용을 못박았다. 사외이사 임기 제한을 만들어 이사회의 독립성을 강화하기 위한 차원이다. 이사 임기가 3년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최장 6년이라는 의미다. 해당 내용을 담은 상법 개정안이 2020년 부터 적용되기 시작했다는 점을 고려하면 3년이나 빠른 셈이다.